[박성희의 W초대석] 정문식 이디엠에스(주) 회장

초중고 시절 배운 기술, 지금도 요긴해
야간공고 나와 28세 때 창고에서 창업
40대초에 연매출 1400억 성공가도 달려
대기업 계약 파기로 순식간에 빈털터리
무인식권기·빨래방 키오스크 개발, 수출도

정문식 (주)이디엠에스(EDMS) 회장 ⓒ여성신문
정문식 (주)이디엠에스(EDMS) 회장 ⓒ여성신문

정문식 ()이디엠에스(EDMS) 회장의 삶은 실로 드라마틱하다. 스물여덟살에 단돈 50만원으로 연립주택 반지하창고에서 창업한 뒤 승승장구, 40대 초반에 연매출 1400억원 상장기업 대표로 성공가도를 걷다가 하루아침에 쫄딱 망하고 14년만에 다시 사옥을 마련하기까지. 그는 가난과 실패가 유산이자 자산이었다고 털어놨다.

정 회장은 1962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어머니는 옛날부터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랬다고 하셨어요. 서울에 왔지만 막상 맨몸으로 아들 둘을 키우자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셨지요.”

정 회장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서울 청계천 앰프조립가게에서 일했다. 중학교 땐 신문 배달과 방과 후 이발(?)로 돈을 벌었다. “교문 앞에서 두발 검사에 걸리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이발기계를 사서 처음엔 공짜로 깎아주다가 실력이 늘자 50원씩 받았지요. 이발소에선 200원씩 내야 하니 다들 몰려 왔어요.”

중학교 때 방과후 이발소 차려

방학 땐 마포구 용강동과 도화동에 있는 프레스공장과 사출공장에 다녔다. 그는 그때 배운 일의 진행순서나 재료의 품질, 가격 등이 지금도 쓸모 있다고 말했다. 실무에 워낙 빠삭하니 석·박사 연구원들도 그의 말에 토를 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겠다고 우겼다. 고생하는 어머니를 돕겠다는 마음이 강했고 공부에 흥미도 적었다. 어머니는 고등학교는 마쳐야 한다며 펄쩍 뛰었다. 형편을 안 담임은 그럼 야간 공업고등학교에 가라고 했다. “그 선생님과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낮엔 공장, 밤엔 학교에 다니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에 못가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보자 서글펐다. ‘공수부대에 가면 낙하산 한번 탈 때마다 1만원씩 준다는 말을 믿고 육군하사관학교를 거쳐 특전사에 자원했다.

46개월 복무하고 제대한 뒤 고등학교 때 다니던 곳에 다시 들어갔지만 6개월 간 봉급도 못받고 그만뒀다. 1990, 창고에서 카스테레오용 전선가공업을 시작했다. “책에서 보니 스티브 잡스와 마이클 델 등 유명인들이 죄다 창고에서 창업했더라구요. 나도 해보자 싶었지요.”

고스톱판 술심부름하며 정보 수집

이레전자산업()의 시작이었다. 사업은 쉽지 않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하는 건 다반사. 고스톱도 모르고 술도 안 마셨지만 틈틈이 중소기업인들 고스톱판에 가서 술담배 심부름을 했다. 그러면서 어디가 잘되고 어디가 안된다. 뭐뭐는 가격이 오른다등 정보를 얻었다.

기술이 늘면서 휴대폰단말기와 LCD모니터를 생산했다. 대기업에 휴대폰을 납품하고 대형 TV도 만들었다. “미국 벨사 CEO에게 5분만 만나달라고 졸랐어요. 사흘을 쫓아다니니 만나 주더군요. 초소형 무선전화기 750만 달러어치를 주문 받았어요.”

직원만 1200. 1000명은 휴대폰을, 200명은 디지털TV에 투입됐다. 회사가 커지면서 직원 복지에도 힘썼다. 매년 전직원에게 김장을 해주고 5년 이상 다닌 직원들 자녀는 3개월간 어학연수를 보내 줬다. 그의 성공스토리는 SBSTV 드라마 신화’(김종학 연출, 16부작)의 소재가 됐고, ‘다섯평 창고의 기적’(국민일보)이란 책으로도 나왔다.

20061월 기존 거래처와 100만대 납품계약을 맺었다. 생산시설과 인력 투자 등에 570억원을 들였다. 상장도 했다. 연매출 1조원을 바라봤다. 신화가 역사가 되려던 참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발주처에서 생산시스템을 무인화하겠다며 계약을 파기했다. 소식이 알려지자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은행에선 대출금 회수에 나섰다.

어음을 안써 부도는 안났지만, 경기도 평택의 4000, 서울 구로 2000평 등 회사 건물과 공장, 심지어 집까지 경매로 넘어갔어요. 남은 게 아무 것도 없더군요. 주위에선 소송을 하라고 했지만 안했어요. 그냥 수업료 한번 크게 치렀다 생각했지요.”

이레전자 상장폐지, 집까지 경매 처분

2007년 이레전자는 상장 폐지되고 그는 빈 손뿐인 신세가 됐다. 정상에서 급전직하했지만 정 회장은 주저앉지 않았다. 1200여명 직원 중 남은 13명과 경기도 안양에 60평을 얻어 다시 시작했다. 한동안은 생활비조차 내놓을 수 없었다. 아내가 꽃집을 차려 살림에 보탰다. 지인들이 경조화 주문을 몰아준 덕분이었다.

재출발한 지 7, 2014년 그는 ()이디엠에스를 창업하고 무인화기계 생산에 나섰다. “무한책임 에프터서비스를 보장했어요. 생소한 분야니까요. 처음엔 조달청 등록제품으로만 납품하다 범위를 넓혔지요. 인건비를 절약하려는 소상공인이 늘면서 무인식권발권기 등 무인키오스크가 주목 받기 시작했어요. 무인카페도 그렇구요.”

일단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서 이디엠에스 제품을 찾았다. 현재 EDMS의 무인키오스크는 전국 3000여 군데, 무인카페는 1130군데로 늘었다. 무인카페는 업계 1위다. 무인카페의 경우 맛 평준화를 위해 원두는 일본 UCC 제품만 사용한다. 보급 초기 월 120kg이던 구매량이 지금은 월 10톤에 이른다. 무인카페에서 판매되는 커피만 월 100만 잔. 커피기계 속에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장착, 휴대폰으로 혼자 조작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EDMS는 또 전국 100여 군데 대학에 식권발권기를 대여 중이다.

무인카페 전국 1130, 100만잔 판매

무인카페가 늘어나면서 자회사 이레F&B를 창업했다. 현재 카페에서 사용하는 컵, 우유, 뚜껑 등을 제공하지만 조만간 단백질음료 등 건강기능식품시장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전국 코스트코 매장 17곳에 간편식 판매기계를 판매했어요.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시대를 맞아 반응이 좋아요. 앞으론 선식과 샐러드 무인판매기계도 내놓을 거에요. 소프트웨어만 개발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국내의 IT기술이 뛰어난 만큼 기획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바닥에서부터 한 걸음 두 걸음 다시 내딛은 결과 정 회장은 이레전자 상장폐지 14년 만인 올해 경기도 안양에 사옥을 마련했다. 지하1층 지상 5, 연건평 3000평 짜리다. 130억원에 나온 걸 사정사정해 10억원 깎았는데 계약 즉시 50억원이 올랐다고.

이레전자 전성기 때부터 매년 대학생 15명에게 200만원씩 장학금을 지급했어요. 아무리 어려워도 그것만은 멈추지 않았죠. 그러다 작년에 코로나19 덕을 봤어요. 비대면시대를 맞아 무인화기기 주문이 급증했으니까요. 제가 다니는 여의도 순복음교회에 1억원을 기부했어요. 자영업 하는 분들을 위해서요. 그런 다음 뜻밖에 좋은 사옥을 얻게 됐어요.”

주위에선 다들 정 회장을 신기해 한다. 야간공고 출신으로 IT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대기업 근무경력도 없으면서 첨단기계를 만드는 게 불가사의라는 것이다. 이런 궁금증에 대한 그의 답은 간단하다. “지혜는 구하면 얻어지는 듯해요. 밤낮 없이 생각하다 보면 자다가도 떠오릅니다.”

정문식 (주)이디엠에스(EDMS) 회장 ⓒ여성신문
정문식 (주)이디엠에스(EDMS) 회장 ⓒ여성신문

세상 혼자 못살아, 나눔·신용이 자산

한창 잘 나가던 2000년대 초반 서울대공대와 카이스트에서 벤처정신에 대해 강의했던 그의 남은 소망은 수출 증대다. 이레전자 시절 동탐산업훈장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한 까닭이다. 현재 집에서 휴대폰으로 동네 빨래방 기계 가동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빨래방 무인키오스크를 만들어 일본에 수출 중인데 장차 기기의 종류와 범위를 넓혀 세계 각국으로 수출할 작정이다.

정 회장의 인생철학은 단순하다. ‘남처럼 하면 남 이상은 못되고, 실수와 위기를 두려워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주영 회장님이나 일본의 마쓰쓰다 고노스케 회장님같은 기업인의 전기를 읽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분들 말고도 누구에게나 배울 게 있다고 믿습니다.”

고졸 성공신화로 유명했던 정 회장의 인생 1막은 드라마 신화MBC TV  '다큐멘터리 성공시대' 81화로 알려졌다. 우리 나이 육순을 맞아 인생 2막을 펼치는 그의 각오는 담담하고 단호하다. “돕고 살아야죠. 세상 혼자 못 살잖아요. 내가 제조업에서 그렇게 어렵다는 재기에 성공한 것도 모두 어려울 때 발 벗고 도와주신 분들 덕분이에요. 어떤 경우에도 신용을 지키려 애쓴 것도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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