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W초대석] 황호연 대호그룹 회장

정직 중시하고 사람 공경했더니 운 따라와
한양대 요업공학과 1회, 평생 세라믹 외길
블록집 외벽용 빨간타일 & 염전타일 개발
2019년 한국세라믹연합회 회장 맡아 헌신

황호연 대호 그룹 대표 ⓒ홍수형 기자
황호연 대호그룹 회장 ⓒ홍수형 기자

‘의이건리’(義以建利, 바른 도리로 이익의 근본을 삼다)와 ‘상경상애’(相敬相愛, 서로 공경하고 사랑한다). 황호연 대호그룹 회장의 인생 및 경영 철학이다. 맨손으로 시작, (주)대호IR (주)대호레포츠, (주)대호알프스톤 (주)월간세라믹스 등 5개 계열사를 둔 그룹을 일군 그가 꼽는 성공 비결은 정직과 운이다. 가훈도 건강· 정직· 성실이다. “매사 원칙대로 성심성의껏 했더니 운이 따랐다”고 말한다.

황 회장은 전북 순창 동계면 주월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 동주(東舟)는 출생지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아버지가 일찍(33세)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할머니 손에 자랐다. 그는 지금도 사무실에 어머니와 할머니의 사진을 간직하고 있다. 전주고등학교(36회)를 나와 서울대 공대에 응시했다가 실패, 새로 개설된 한양대 요업공학과에 입학했다.

“형편상 이과를 택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친구 삼촌(전북대 교수)께서 ‘요업과가 전망도 괜찮고 1회니까 취업하기도 쉬울 것’이라고 일러 주셔서 그대로 했지요.” 서울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형편이 괜찮은 외사촌 누님의 서울집에서 5촌 조카들 과외를 하는 등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툭하면 전차비도 없었다. 대학 2학년 때 1년6개월만에 제대가 가능한 학보 군번으로 입대했다. ROTC가 생긴 해였지만 복무기간이 짧은 쪽을 택했다.

1979년 인천에 대호타일공업사 창업

제대 후 복학, 1965년에 졸업했다. “부산에 있는 대한도기(주) 사원 공채에 응시했어요. 대한도기의 모체는 1917년 설립된 조선경질도자기(주)였어요. 당시 직원이 1500명이나 되던 큰 회사였지요. 33명 중 4명이 뽑혔는데 연세대 1명 한양대 1명 부산대 2명이었어요.”

그는 입사 후 연구개발에 몰두한 결과 5년만에 공장장이 됐고 4년 뒤 상무로 승진했다. 블록집 외벽에 붙이는 빨간 벽돌을 개발하는 등 타일에 관한 지식과 기술력을 인정받아 1977년 서울세라믹스공업 상무로 스카웃됐다. 주식을 주겠다는 등 좋은 조건을 제시해 옮겼으나 회사가 어려워지는 바람에 주식도 못받고 그만뒀다.

그 바람에 창업했다. 1979년 인천 문학동에 작은 공장을 얻어 자기 사업을 시작한 것. 대호타일공업사. 대호(大戶)는 큰 집이라는 뜻으로 그가 직접 지었다. 창업 후 빨간 타일 등 건축자재를 생산 판매하는 한편 밤잠을 안자고 연구를 거듭했다. 문제는 비수기인 겨울이었다. 건축과 인테리어 모두 일이  적었던 까닭이다.

“어느 날 거래하던 서울 중구 을지로 타일 점포에서 염전에 깔 타일을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당시 염전에선 장독 깬 조각을 묻었는데 울퉁불퉁한데다 틈도 많아 새로운 타일을 원한다는 거에요. 해보겠다고 하고 시작했는데 간단하지 않았어요. 크면 깨지고 두꺼우면 떨어지니까요. 실험 제작을 거듭한 끝에 까만색 염전타일을 고안해냈지요.”

까만색이라 햇빛은 최대한 흡수하고 수분은 잘 증발시켜 소금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었다. 색깔만 검정으로 한 게 아니라 소금을 긁어 모으는 당그래가 걸리지 않도록 모서리 부분을 둥글게 하고, 흡착력을 높이기 위해 갯벌에 닿는 부분은 문어발처럼 처리했다. 염전사업자들은 환호했다. 돈은 얼마든 줄 테니 만들어달라고 했다. 11월부터 3월까지 염전타일을 만들어 염전사업 발전에 기여하는 한편 사업도 확장했다.

 ‘세라믹코리아’ ‘월간 도예’ 창간

타일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세라믹계 원로가 세라믹 업계에도 전문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며 잡지 창간을 권유했다. 1988년 월간세라믹스를 설립, ‘세라믹코리아’와 ‘월간도예’  두 가지를 창간했다. 잡지의 경우 수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관련 업계와 종사자, 학계를 위해 30여년 간 단 한번도 쉬지 않고 꾸준히 발간해왔다.

타일 사업은 쉽지 않았다. 1990년대 초만 해도 국내 타일업계에선 불량품이 잦은 데다 큰 것은 못만들었다. “이탈리아 건축자재전에 참가해 보니 그쪽 타일은 크기도 크거니와 돌같이 단단했어요. 인천 남동공단에 자동공장을 만들고 품질 좋은 타일을 생산했어요.”

국내 타일업계 최초로 품질관리 1등급을 획득하고, 우수건축자재 부문 건설부장관 표창과 품질관리 부문 대통령 산업포장도 받았다. 또 도자기타일 KS협의회 회장, 대한도자기타일공업협동조합 이사장, 중소기업중앙회 기술경영분과위원장, (사)옥천향토문화연구원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세라믹업계와 지역 발전을 위해 진력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7~1998년 외환위기를 견딜 수 없었다. 현대· LG· 대림 등 대기업에 납품하고 4~6개월짜리 어음을 받았으나 치솟는 금리와 유동성 제로인 상황을 버티기 어려웠다. 게다가 아무리 애써 만들어도 중국에서 우리 원가보다 싼 타일들이 쏟아졌다. 눈물을 머금고 타일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타일 1평에 1만원 들여 만들면 중국에선 7000원에 공급하는 여건 상 타일사업은 키우지 못했지만 다른 사업, 특히 부동산 쪽은 실패가 없었다. 땅과 빌딩 모두 매입하는 것마다 값이 올랐고, 2010년엔 현대시멘트에서 운영하던 충북 단양의 오스타CC를 600억원에 인수했다. 시설 좋고 잔디 좋은 퍼블릭골프장으로 유명한 대호단양CC가 바로 그곳이다.

황호연 대호 그룹 대표 ⓒ홍수형 기자
황호연 대호그룹 회장 ⓒ홍수형 기자

오스타CC 인수, 대호단양CC로

“1980년대 중반이었어요. 세라믹 업계에서 일본에 산업시찰을 갔었는데 버스에선가 가이드의 얘기가 귀에 들어왔어요. 건물은 역에서 반경 500m 이내의 것을 사야 한다는 거에요. 잘 알던 부동산 전문가 한 분은 집이든 땅이든 북쪽과 서쪽이 낮은 곳은 피하라고 조언하셨구요. 두 가지 모두 마음에 두고 실천했더니 운 좋게도 좋은 땅과 건물을 얻을 수 있었어요.”

골프장은 평소 ‘골프장이 있으면 마음껏 골프를 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하던 중 인연이 닿았다. 인수 후 매년 상당한 금액을 투입해서 손 보고 꼼꼼하게 관리한 결과 충북 일대는 물론 서울에서도 찾는 우수 골프장이 됐다. “인복이 있는 덕이에요. 골프장 관리상무는 20년 넘게 함께 일하고 있고, 총지배인 또한 오스카CC 시절부터 줄곧 계시던  분이에요.”

황 회장은 자수성가할 수 있었던 힘으로 ‘운과 인복’을 들었지만, 그 바탕은 뚝심과 사람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때 그때 느낌으로 밀고 나갔어요. 눈 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정직· 솔직하고 사람을 공경하면 누구와도 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끈기도 있는 편이구요. 대출이 필요할 때 지점장이 안 만나주면 은행장을 찾아갔어요. 억울한 세무조사를 당했을 땐 문전박대를 무릅쓰고 끝까지 세무서장을 만나 사정을 설명한 끝에 정당한 처분을 받았어요.”

황 회장은 평생을 엔지니어라는 자부심과 긍지로 도자기· 타일· 세라믹 분야에 헌신한 요업업계의 산 증인이자 한국 세라믹산업 발전의 주역이다. 한양대 요업공학과 1회 졸업생으로서 유일한 현역인 그는 1965년 세라믹산업 입문 후 시멘트· 유리· 위생도기· 타일 등 건축자재의 기술혁신을 주도하고, IT산업의 핵심기능소재인 파인세라믹의 기술 자립에도 헌신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17년 서울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동문들이 선정하는 ‘서울대AMP대상’을 수상하고, 2019년 2월엔 한국세라믹연합회 회장으로 선임됐다. 한국세라믹연합회는 세라믹업계는 물론 한국세라믹기술원, 한국세라믹학회 등 세라믹 관련 산·학·연 단체를 망라한 곳이다. 매년 ‘세라믹의 날’ 개최, 한국국제세라믹산업전 개최, 세라믹산업 통계조사, 세라믹산업 발전을 위한 산학연 심포지엄 개최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친다.

“세라믹은 안 쓰이는 곳이 없어요. 도체는 전기가 통하는 것, 반도체는 전기가 반만 통하는 건데 세라믹은 반도체의 핵심인 만큼 미래 첨단산업의 주역으로 자리잡을 거에요. 거창한 포부를 내세우기보다 힘 닿는 데까지 세라믹 발전에 기여하고, 회원들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연합회를 만들도록 노력할 작정이에요.”

‘서로 공경하고 사랑한다’라는 생활신조 겸 경영 철학처럼 큰 키(178cm)에도 불구하고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는 황호연 회장. 국내에서 프로와 아마추어 통산 7번째 알바트로스(1989년 5월 골드CC)를 할 만큼 장타였지만 요즘엔 나이 탓인지 거리가 많이 줄었다며 ‘계기가 되는 대로 많든 적든 우리 사회를 위해 적절한 곳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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