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 이야기]
김애옥 동아방송예술대 교수(시인)
어머니 김봉례 씨

김애옥 교수와 어머니 김봉례씨. ⓒ김애옥
김애옥 교수와 어머니 김봉례씨. ⓒ김애옥

엄마, 엄마가 계신 그곳에도 가을이 깊어가나요? 창밖의 나뭇잎들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어요. 단풍은 자기 자신을 올인한 결과라는데 엄마라는 존재가 단풍이네요. 올가을 엄마는 무슨 빛깔로 내 곁에 와주실 건가요?

엄마라는 나무는 그저 뿌리째 갉아 먹게 내버려두고 열매와 잎사귀까지 다 내어주고 발가벗은 나목처럼 계셨던 그 사랑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엄마가 늘 하시던 말씀, “사람은 열 번도 변한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무시하면 안 된다.” 그 말씀 덕분에 난 판단을 보류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던 것 같아요.

사람에 관해서나 사실관계에 대한 판단을 단순히 한두 박자 늦춘 시기적 연장을 통해서만이라도 크고 새로운 결과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치는 사람이 되었어요. 예를 들어 말이 많은 것으로 보아 가벼운 사람일 것이라든가, 자신의 주관이 없는 것으로 보아 회색분자라든가 등의 판단을 잠시 보류하고, 있는 그대로 보기를 노력하게 되었어요. 우리는 때로 미리 판단해 버린 뒤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보고 싶은 대로 보고 그러기도 하잖아요.

엄마 아시죠?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저에게 정식으로 사과하셨던 일이요. 중학교 1학년 때였죠. 물건을 잘 흘리고 다니는 버릇을 고친다고 늦은 밤 교실에 가서 우산을 가져오라 시키셨던 일이 내내 엄마 마음에 걸렸었나 봐요. 이미 어둑해진 시각에 집에서 쫓겨나 시내버스를 타고 가서 컴컴한 학교정문을 통과하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 들어간 기억이 납니다. 엄마가 혹시 친엄마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더랬어요. 

김애옥 교수와 어머니 김봉례씨. ⓒ김애옥
김애옥 교수와 어머니 김봉례씨. ⓒ김애옥

엄마는 모든 일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완벽하셨어요. 옷도 최고급 양장지를 사다가 만들고, 하지 못하는 음식이 없으셨고 종손며느리로 얌전하고 똑똑하기로 소문났지요. 엄마랑 광주시내를 걸어가면 낯선 사람이 그 옷 어디서 사 입었냐고 묻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어요. 엄마는 은근히 즐거워 하셨지요.

여러 방면에서 도저히 엄마를 따라갈 수 없었던 큰 딸은 늘 엄마 앞에서 위축되기도 했었음을 이제야 고백합니다. 김장 하는 날이었을 거예요. 동네 아주머니들까지 와서 일손을 돕고 시끌벅적한데도 방안에 틀어박혀 책만 읽고 있던 큰딸 방문을 열어보시고는 “너는 궁금하지도 않냐? 우리 큰딸은 살림은 못하겠고 다음에 작가 하면 딱 맞겠네” 그러셨는데 엄마 말대로 글을 쓰고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고 있어요.

엄마, 제가 우리 여학생들에게 “백마 탄 왕자 기다리지 말고 자기 스스로 벌어서 백마든 백색차든 사버리라”고 말해요. 엄마에게 배운 경제적 독립심이 제게도 영향을 미쳤어요. 외모는 코스모스 같으셨던 우리 엄마, 정말 여장부셨어요. 외유내강이라는 표현은 엄마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자식들이 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엄마의 끊임없는 경제활동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리 어려워도 아이들이 대학가기 전까지는 가게를 차린다든가 집을 비우는 일은 하지 않겠다며 굳이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만 하셨던 것도 특별하셔요. 감사한 일이지요.

20대부터 극장을 짓고 사업을 하셨지만 집안경제는 돌보지 않은 한량 남편을 엄마는 바라만 보고 있지 않으셨지요. 젊은 여자가 건축일을 하셨을 때,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요. 집장사 딸로 자라면서 새집에 잠깐 살다가 자주 이사 가야 해서 전 싫었어요. 아침이면 노동자 아저씨들이 몰려오고 엄마는 공그리, 와리, 와꾸, 십장 같은 용어를 큰소리로 외쳤어요. 잠결에 듣는 그 소리로 아침을 시작하곤 했지요. 억척스럽게 보이는 엄마가 때론 무섭기도 했어요. 정작 ‘판단의 보류’ 교훈을 엄마에게는 적용하지 못했지요. 있는 그대로 보아드리고 이야기도 들어드리고 그랬어야 했는데 우리 엄마는 원래 강한 엄마로 단정하고 엄마 그늘에서 미숙아처럼 그렇게 살다가 결혼을 했네요. 

김봉례씨. ⓒ김애옥
김봉례씨. ⓒ김애옥

엄마, 지금의 내 나이에 남편을 잃고 홀로 20년을 사셨지요. ‘니 아버지 미워서 하나도 안 그립다’ 그러셨지만 엄마도 아버지가 보고 싶으셨지요? 삼킬 듯이 물고 부시던 하모니카 소리도 그립고, 유머러스하게 치시던 전자 기타 연주도 듣고 싶어요. 아버지가 하신 말씀 중 ‘나는 야당도 여당도 아니고 인간당이다’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어요. 진정한 휴머니스트셨지요. 남들에게는 최고의 호인이고 부인에게는 책임감 없는 가장이셨고요. 천국에서 아버지 만나셨지요? 2년 전 엄마마저 소천하셨을 때 한동안 꿈에 보이지 않던 아버지가 활짝 웃고 계셨어요. 엄마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드리는 편지가 되었네요. 엄마, 항상 물가에 내놓은 아이같다는 큰 딸이 자식 같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덜렁대고 물건 잘 흘리고 다니는 못 미더운 딸이었지만 마음씨는 내가 보장한다고 하셨던 우리 엄마, 중학교 때까지 세련되어 보이는 기성복 옷을 사주지 않아 불만이었는데, 엄마가 신문지 오려 패턴 뜨고 재봉틀 돌려서 만들어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메이드인 엄마 옷이 입고 싶네요.

엄마, 저야말로 정식으로 사과드리고 싶은데 엄마가 안 계셔요. 막내딸을 먼저 보낸 참척의 슬픔 앞에 ‘너희들은 내 마음 몰라야~’하시던 그 말씀, 충분히 공감해드리지 못하고 잊으라고만 했던 어리석음을 통회 자복합니다. 정말 몰라 드리고 말았어요. 그 고통의 심연에 함께 빠졌으면서도 입바른 소리 해댄 큰딸에게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엄마, 용서해주세요.

엄마, 언젠가 유선전화로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읊어 주셔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요. 가정경제는 외면하고 밖으로만 돌던 남편을 대신해서 경제적 가장으로 억척스럽게 사셨던 엄마 가슴에 시심이 있음을 느낀 순간, 찡했음을 이제야 고백합니다. 엄마를 안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제 안에 엄마가 심어주신 유전자가 가득입니다. 광주 친정에 내려갈 때마다 평소에 엄마가 내게 해주셨던 말들을 모으니 시가 되었어요.

<올 시한은 추워야 이것이 따닷허다

더우엔 뭐니 뭐니 혀도 모시이불이 지일이제

비겟닢 새로 갈았시야 요거 비고 자

야야 배기먼 등짝 아퍼, 깔고 자 고실고실해

나? 구름 이불 한 채면 되지야

뭣 허냐? 다 태워 불어>

'구름이불' 전문 (시집‘뱀파이어의 메일함’ 중에서)

청쾌한 가을하늘 올려다볼게요. 구름이불 덮고 있는 우리 엄마, 그곳에서는 평안하셔야 해요. 사랑해요...엄마!

 

<김애옥>

동아방송예술대학교 교수. 한국방송작가협회 정회원. ‘공룡선생’ 등 TV드라마 집필. ‘뱀파이어의 메일함’(시집), ‘그대가 나의 편지’ ‘응답하라 필승’ 등 출간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