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받은 아이, 매 맞던 아내...내 인생 다큐로 만듭니다
학대받은 아이, 매 맞던 아내...내 인생 다큐로 만듭니다
  • 이세아 기자
  • 승인 2021.10.23 11:34
  • 수정 2021-10-24 16: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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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생존자입니다]
아내폭력 생존자 ②
임연경 다큐멘터리 감독
홀로 견뎌야 하는 줄 알았던
아동학대·아내폭력
험난한 이혼·자립 과정
영화화해 세상에 알릴 계획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내 잘못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에요”

가장 안전한 공간이어야 할 가정, 그러나 한국 여성 대부분은 일생에 적어도 한두 번은 남편이나 애인에게 폭력을 당한다. 2009~2020년까지 남편이나 애인에게 살해당하거나, 살해 위기에 처해 기사화된 여성만 1072명이다(한국여성의전화). 폭력 남편으로부터 도망쳐 숨어 살던 여성들은 이제 당당히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낸다. 자신의 자립기를 영화화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임연경 씨를 만났다.

폭력 남편으로부터 도망쳐 숨어 살던 여성들은 이제 당당히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낸다. 자신의 자립기를 영화화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임연경 씨를 만났다. ⓒ여성신문/임연경씨 제공
폭력 남편으로부터 도망쳐 숨어 살던 여성들은 이제 당당히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낸다. 자신의 자립기를 영화화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임연경 씨를 만났다. ⓒ여성신문/임연경씨 제공

‘임작가’ 임연경 씨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자신이 겪은 아동학대·방임, 데이트폭력, 아내폭력으로 이어지는 폭력의 고리, 회복·자립기를 영화로 제작 중이다. 제목은 ‘연경하다 프로젝트’. 2022년 상영을 목표로 틈틈이 영화제에 피칭 중이다.

그의 이야기는 가까운 사람들이 저지른 폭력이 한 여성의 자존감을 상처 내고 점점 더 취약한 상황으로 떠미는 과정을 보여준다. 임신을 원치 않았다던 친어머니는 어린 임씨를 장롱에 넣어두고 외출하곤 했다. 아이를 학대하던 어머니가 떠나자, 임씨는 할머니 댁에서 동냥젖과 친척들 눈칫밥을 먹으며 컸다. 새엄마는 아빠 몰래 그를 모질게 때렸다. 벌벌 떨면서도 ‘무조건 엄마 말 잘 들어, 안 그러면 엄마 도망간다’던 어른들 말을 생각하며 버텼다. 초등 2학년 때부터 3년간 이어진 폭행은 이혼으로 끝났다. 딸에게 관심 없던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고 외박이 잦았다. 홀로 방치된 임씨는 10대 때부터 여러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임씨는 늘 남들 앞에선 예쁘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려 했다. ‘혼자서도 잘 컸네’라는 말이 좋았다. 폭력에 무감각해졌고, “나만 잘하면 된다”고 합리화했다. 제 몸과 마음을 살피고 돌보는 법엔 서툴렀다. 안전한 성관계를 하는 법도 몰라서 남자 말만 믿다가 26세 때 덜컥 첫 아이를 가졌다.

갑작스러운 임신이 삶의 전환점이라고 믿었다. 자신도 가족을 꾸려 남들처럼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 4년은 지옥이었다. 남편은 의처증이 심했다. 집에 CCTV를 설치했고, 아내를 때리고 물건을 부수고 두 아이까지 괴롭혔다. 임씨는 2015년 11월 친구에게 처음 이를 털어놨다. “그거 폭력이야, 당장 나와!” 친구의 말에 맨몸으로 가출했다.

4년간 생활비와 이혼 소송 비용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고속도로 휴게소 계산원, 골프장 캐디, 모델하우스 상담사, 온천호텔 프런트, 서빙 등 신분이 노출되지 않고 숙소가 제공되는 일자리만 찾았다.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찾아올까 불안했고, 사람들과도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두고 떠나온 죄책감은 말할 수도 없었다.

2019년 3월 한국여성의전화 가정폭력 피해여성 쉼터 ‘오래뜰’에 자진 입소했다. 임씨는 자신과 비슷한 여성들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는 걸 알았다. 나만 아픈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내폭력, 가정폭력은 너무나 흔했다.

임연경 씨는 자신의 회복과 자립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연경하다 프로젝트’를 제작 중이다. ⓒ여성신문/임연경 씨 제공
임연경 씨는 자신의 회복과 자립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연경하다 프로젝트’를 제작 중이다. ⓒ여성신문/임연경 씨 제공

우리나라 가정폭력 신고 건수는 22만2046건이지만, 신고해도 가해자가 처벌받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국회 입법조사처, 2020). 오히려 가해자가 아무 조치를 받지 않은 경우가 41.8%였다. 그나마도 상담 명령, 접근 행위 제한, 벌금 및 과태료 조치가 대부분이다. 유치장 수감 등 실질적인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 조처는 1.6%에 불과했다(여성가족부, 2019년 가정폭력 피해자 및 관련 지원·수사기관 조사).

임씨는 무력감과 불안에 빠진 피해자들이 지옥으로 되돌아가는 모습도 지켜봤다. 쉼터를 찾은 피해자 10명 중 4명은 퇴소하고 다시 가해자가 있는 집에 돌아갔고, 절반은 결혼 관계를 지속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광주여성의전화, 2020). “아내를 때리는 남자들이 보통 경제권을 쥐고 있잖아요. 혼자 살 길이 막막하죠. 헤어질 결심을 해도 이혼한 여성에 대한 편견, 아이들 문제도 걸려 있다 보니 선택할 여유를 잃기 쉬워요. 쉼터에서 엄격한 통제하에 생활하다 보면 더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고요.”

이혼의 필수 관문인 이혼 조정 절차는 가정폭력 2차 가해로 점철되기 일쑤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 6월 발표한 이혼소송 경험자(297명)·이혼소송 경험이 있는 가정폭력 피해자(4명) 대상 설문조사에 따르면, 대부분 “배우자와의 대면조사 강요”(37.2%), “가사조사관의 편파적 태도나 편견”(31.9%)에 불만을 토로했다. 임씨가 쉼터에서 만난 국선변호사도 “빨리 남편과 화해하고 끝내시라”, “(남편이) 열심히 살면 연경 씨가 돌아올 줄 알았다고 하더라”라고 했다.

조정 절차에선 남편, 시부모를 대면해야 했다. 몇몇 조정위원은 “이 자리에서 가정폭력 얘기하지 마세요”, “엄마가 아이 양육 의무를 소홀히 했으니 소송으로 넘어가 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다”며 임씨를 은근히 윽박질렀다. 남편의 아내폭력 혐의를 제대로 입증하지도, 관련 위자료도 못 받고 소송이 끝났다. 그래도 임씨는 “이젠 가해자의 폭력적인 언행을 참거나 무력함을 느끼진 않는다”며 홀가분하다고 했다.

자립은 또 다른 문제였다. 가해자가 자신의 주소지를 찾아내 괴롭힐 수 없도록 주민등록 열람 제한을 신청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처음 찾아간 서울의 한 주민센터 직원들은 ‘주민번호 열람 제한 업무를 해본 적 없다’며 경찰서로 가라고 했다. 경찰은 ‘주민센터 소관 업무’라며 그를 돌려보냈다. 이런 일들을 생존자 개개인이 발버둥쳐서 해결해선 안 된다고, 법과 제도가 풀 숙제라고 그는 강조했다. 

임연경 씨는 자신의 회복과 자립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연경하다 프로젝트’를 제작 중이다. ⓒ여성신문/임연경 씨 제공
임연경 씨는 자신의 회복과 자립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연경하다 프로젝트’를 제작 중이다. ⓒ여성신문/임연경 씨 제공
2020년 11월25일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 ‘마음대로, 점프!’ 첫 단독공연이 열렸다. (왼쪽) 초록색 옷을 입은 임연경 씨가 하늘로 손을 들어 올리는 동작을 하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김희지 작가
2020년 11월25일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 ‘마음대로, 점프!’ 첫 단독공연이 열렸다. (왼쪽) 초록색 옷을 입은 임연경 씨가 하늘로 손을 들어 올리는 동작을 하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김희지 작가

자립을 준비하던 임씨는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쉼터 시절부터 국비 지원을 받아 영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접하기 쉬운 영상 매체를 통해서 나 같은 사람도 있다고 전하고 싶었어요.” 임작가의 애인이자 음악가 ‘JB’는 “연경이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생생히 알리는 다큐를 만드는 용기에 감탄했다”고 했다.

요즘 임씨는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신의 이야기와 활동을 알리고 있다. 기초생활보장수급자로 살다가 4대보험 지원 일자리를 구했고, 열심히 공부하고 발품을 팔아 전셋집도 마련했다는 그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어렸다.

가정폭력 생존자들이 모여 춤과 노래를 부르는 ‘마음대로, 점프’ 활동이 그에겐 큰 힘이 됐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진행하는 예술치유 프로그램이다. 김씨는 2020년 합류해, 그해 11월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 열린 첫 단독 무용 공연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생존자들의 노래를 담은 ‘우리, 이젠’ 앨범(2020년 11월 발매) 작업에도 참여했다. 김씨의 자작곡 ‘파티룸 302’ 등 다섯 곡이 담겼다. 남편의 폭력을 피해 전국을 떠돌던 시절을 회상하며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불렀다. 이렇게 만난 생존자들이 임씨에겐 아픈 기억을 편안하게 나눌 수 있는 친구이자 서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다른 생존자들에게 그는 말했다. “저는 폭력에 저항하거나 방어하지 않기보다 오히려 자해했어요. 그러지 마세요.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내 잘못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에요. 1366에 전화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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