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순의 증언, 일본 정부 책임 묻는 과정의 시작"

뉴욕타임즈가 일본군 위안부의 첫 증언자였던 고 김학순 할머니가 별세한 지 23년만에 부고기사를 통해 김 할머니를 조명했다. ⓒ뉴욕타임즈 홈페이지 갈무리
뉴욕타임즈가 일본군'위안부'의 첫 증언자였던 김학순 인권운동가가 별세한 지 24년만에 부고기사를 통해 조명했다. ⓒ뉴욕타임즈 홈페이지 갈무리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지난 1991년 처음으로 일본군'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여성인권운동가 고 김학순 할머니를 부고기사에서 조명했다. 지난 1997년 김 할머니 별세한지 24년 만이다.

NYT는 지난 21일(현지시각) 김학순 운동가가 1991년 8월 14일 처음으로 TV 카메라를 마주하고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고 보도했다. 

김학순 운동가는 2차셰계 대전중에 중국에 있는 이른바 '위안소'로 끌려가 일본군들로부터 성폭행 당했던 사실을 증언했다. 김 할머니가 위안부로 끌려갔던 때는 겨우 17살 이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군인들이 나에게 강제로 달려들었을 때 끔찍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제가 도망치려고 했을 때, 그들은 저를 붙잡았고 다시 저를 끌고 들어갔다."

NYT는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을 위해 계획했던 성노예의 참상에 대한 김학순 운동가의 증언이 다른 생존자들도 나서도록 용기를 줬다고 전했다.

코넷티컷 대학의 알렉시스 더든 역사학 교수는 "그는 20세기의 가장 용감한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김학순의 초기 진술은 연구원들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문서 증거를 발견하도록 촉구했다. 이는 유엔이 전쟁 범죄와 반인륜 범죄에 대한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묻는 여전히 계속되는 과정의 시작이었다"라고 평가했다.

김학순 운동가는 증언이 있은 지 6년 만인 1997년 12월 16일 73세의 나이로 폐질환으로 숨졌다. 그는 1924년 10월 20일 중국 북동부 지린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모들은 일본의 한국 식민지 지배 기간 동안 이주했다. 김학순 운동가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직후 사망했으며 어미니와 함께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김학순 운동가 등이 1992년 매주 수요일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작한 수요 시위는 지금까지 열리고 있다.

NYT의 '더는 간과할 수 없다' 시리즈를 통해 지난 1851년부터 자사에 보도되지 않은 괄목할 만한 인물의 부고를 다룬다. NYT는 이번 시리즈에서 "그는 오랜 유산을 남겼다"라며 김 할머니가 중국과 호주, 네덜란드, 말레이시아 등의 피해자가 나설 수 있도록 감명을 줬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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