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폭력상담소 30주년을 보내며

1991년 4월 13일 한국성폭력상담소 개소식에서 최영애 초대 소장 발언하는 모습. ©한국성폭력상담소
1991년 4월 13일 한국성폭력상담소 개소식에서 최영애 초대 소장 발언하는 모습. ©한국성폭력상담소

‘아, 30주년을 치러야 한다니!’ 한국성폭력상담소 2021년 1월 30차 총회에 소장직 출마를 결심하면서 제일 걱정되었던 것 중 하나는 30주년이었다. 30주년이라니! 근사하고 묵직하면서도 축제같은 기념식을 해야 하는거 아닌가. 코로나 시기에, 일상 업무로도 바쁜 상담소의 하루하루에서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부담이 컸다. 그러나 사실 행사 기획과 실무에 대한 고민만이 아니다. 30년이라는 역사적 기점에서, 다시 30년을 시작하는 교차점에서 지난 운동의 성과를 이어가면서도 한계와 과제를 직면하고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그러면서도 우리의 조건과 상황에 맞는 활력을 조직해갈 수 있을까? 그것이 제일 큰 걱정이다. 나 혼자 고민해야 하는 일이 아니고 모든 상근활동가들, 이사회, 회원과 자문위원들, 생존자들, 상담소를 지지하는 분들과 함께 하면 되는 것임을 알지만, 밤에는 잠이 안 오고 사무실에 가면 다시 마음이 평정하게 돌아오는 나날이 이어졌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국성폭력상담소 건물. 설계 : 황두진 건축사사무소 ⓒ황두진 건축사사무소. 사진 박영채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국성폭력상담소 건물. 설계 : 황두진 건축사사무소 ⓒ황두진 건축사사무소. 사진 박영채

분명한 건, 닥쳐서 치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들은 1년 전인 2020년 초부터 모든 상근활동가들이 참여하는 TF를 꾸렸다. 비전/지속가능성팀, 조직문화/스마트워크팀, 홍보, 규정 및 원칙 정비팀이 일년간 빼곡이 활동했다. 상담소에 대한 설문조사와 FGI를 진행하고, 조직운영과 지속가능성 차원의 중요 과제들을 논의하고 안을 냈다. 상담/지원에서의 윤리규정을 새로 명문화하고, 자료 아카이브와 온라인 사무활용을 서로 교육하면서 도입하고, 상담소와 부설기관의 시각디자인을 정돈하고 30주년 슬로건을 도출했다.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가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2020년 7월 13일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에서 김혜정 소장이 손팻말을 들어보이고 있다. ⓒ홍수형 기자

그러던 와중, 2020년 여름 서울시장 위력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본 상담소는 한국여성의전화와 함께 피해자 지원을 하게 되면서, 정치, 시민사회, 진보적 여성운동이 충격받고 또 반목하는 현 주소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가해자가 사망하게 되면서 진실규명과 책임촉구는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안개 속에서 손전등을 켜는 심정으로 매일 밤 회의가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피해자 지원정보가 여성운동가와 여성운동 출신 정치인과 보좌진을 통해 여성운동 및 시민사회와 가까웠던 가해자에게 전달되는 사안이 발생했고, 이 사건이 여성운동 전반에 대한 공격, 더 나아가 피해자의 진실성에 대한 공격과 훼손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고뇌했다. 이 사안들이 공개된 전후로, 우리 상담소는 반성폭력 운동단체로서의 역사와 정체성, 인적네트워크, 운동 방향과 사건지원 원칙 모두를 다시 점검하고 설명하고 제안해야 하는 위치에도 놓였다. 2021년 1월 30차 총회에 이어, 2월 임시총회까지 준비하고 치르고, 그 여파를 맞닥뜨리면서 상근활동가들은 상담소 30주년의 의미를 바닥부터, 뼈대까지 느끼고 실감했다. 

예정했던 30주년 기념식을 하반기로 미뤘다. 기념식의 내용과 기획을 처음부터 고민하게 됐다. 여성주의적 반성폭력운동은 무엇을 균열내고 어떻게 변화를 우리들의 삶으로 가져오는 운동인가? 우리는 어떤 역사 위에 있고 무엇을 바라보며 어떤 위치성과 움직임으로 활동할 것인가. 이걸 어떻게 말과 글과 이미지로 표현해내고 널리 나눌 것인가?

한국성폭력상담소 30주년 기념식 영상에서 활동가들이 비전선언문을 낭독하는 모습. 이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유튜브 영상
한국성폭력상담소 30주년 기념식 영상에서 활동가들이 비전선언문을 낭독하는 모습. 이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유튜브 영상

코로나19로 유튜브 송출이 불가피해지면서 한 시간이 순삭하는 지루할틈 없는 예능같은 한 시간 짜리 쇼를 짜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말하기’라는, 균열을 일으켜온 행위를 영상에 담기로 했다. 생존자, 활동가, 글쓰는 사람, 연구자 등 반성폭력 운동을 같이 만들어 온 일곱분을 모셨다. 시각디자이너와 ‘균열을 일으키는 용기, 일상에 스며드는 변화’라는 슬로건을 역동적이고도 몽글몽글한 물의 흐름으로 형상화했다. 차별금지법 제정 활동으로도 정신없이 바빴던 연분홍치마에서 영상제작을 맡아주셨다. 30년간 매년의 주요 흐름을 자료 한 줄 한 줄 인용하며 ‘86,549회의 말하기(2020년까지 상담횟수)가 만든 사회’ 라는 영상으로 축약했다. 상근활동가들은 ‘비전 선언문’을 함께 써내고 한 문장 한 문장 표정과 목소리로 읽었다. 이 모든 말하기를 수어통역사들이 옮겨주셨고, 자원활동가들이 자막을 제작했다.

30주년 행사 주간을 지나며 주신 문자, 카톡, 메일, 통화는 활동가들에게 더없는 격려가 되었다. 그 사이에는 “요즘에 여성단체들이 영향력이 있나?” 하는 높은 자리에 계신 어떤 분의 말씀도 있다. “몇몇 대표만이 아니라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들려서 좋았고, 비전선언문 문장들이 한 줄도 버릴 것 없이 용기를 줬어요” 우리의 현재를 읽어 낸 눈, 입장을 표명하는 용기에 연대하는 피드백도 있다. 415분의 특별후원자는 자랑스럽고 든든한 뱃심이 되었다.

OO주년 행사를 준비하는 여성운동단체, 인권단체 홍보물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준비하는 부담감과 긴장이 클텐데! 정말 소중한 역사인데 일상이 바쁜 사람들이 많이들 참석하실까? OO주년을 치른 우리들은 새로운 시도도 아낌없이 해보게 될까. 다채로운 마음이다. 휴, 우리는 끝났다! 안도와 함께.

여성신문사 33주년, 동지의 마음으로, 독자의 마음으로, 거래처의 마음으로, 여성시민의 마음으로, OO주년을 준비했던 실무자의 마음으로 아낌없이 응원하고 지지하며, 본 상담소 30주년 비전선언문의 한 구절을 선물로 나눈다. “우리는 계보 있는 자신감 위에 서서 길을 잃지 않는다. 고립되고 지쳐 주저앉는 대신 연결되고 기대어 불안정한 시대를 모험하겠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신임 소장. ⓒ홍수형 기자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홍수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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