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고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 이사장을 추모하며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장이 2016년 부산진구 어린이대공원 학생교육문화회관 광장에서 열린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서 기념사를 하는 모습. ⓒ뉴시스
김문숙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장이 2016년 부산진구 어린이대공원 학생교육문화회관 광장에서 열린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서 기념사를 하는 모습. ⓒ뉴시스

‘허스토리’영화는 아직도 진행 중 

“위안부 할머니들은 내가 같이 있어 주고 들어준 것만으로도 하나의 보상을 받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위안부, 종군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등의 용어는 전쟁과 여성의 암울한 역사의 한 자락을 가늠하게 한다. 매주 수요일이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주관으로 일본대사관 앞은 수요집회가 열렸다. 누군가의 관심을 받든 받지 않든 역사를 항변하는 목소리는 이어져왔고 우리 삶 속에 역사의 흔적은 스며있었지만 무심하게 넘기고 만다. 1992년 10월 서울에 나눔의 집이 개관했지만 할머니들의 트라우마는 일생을 지배했다. 그런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살포시 들여다보고 함께 하기로 나서준 사람 ‘김문숙 이사장’.

그녀는 나눔의 집이 개관하기 한해 전 1991년 60대의 늦은 나이에 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를 설립하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남은 여생을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을 향해 당당하게 외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재를 털어 사무실을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허스토리’ 영화처럼 그녀는 일본을 향한 전쟁을 선포했다.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 기념행사에 참석한 김문숙 이사장.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 기념행사에 참석한 김문숙 이사장.

「부산종군위안부」「여자정신대」공식사죄 청구사건

시모노세끼 재판
원고 : 하순녀.박두리.유찬이.박소득.박순복.이영선.강용주.정수련.이순덕
피고 : 일본국
소송물 가액 : 금 2억 8600만엔
첨용 인지액 : 금 97만 5600엔

김문숙 이사장의 정신대 문제를 향한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에 귀기울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할머니들의 용기도 이어졌다. 강제로 끌려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3명, 여자정신근로령에 의해 일본공장에 동원된 근로정신대 7명, 그 외에도 세상에 존재를 알리기 힘들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그리고 위안부 원고들의 피고국 일본에 대해 전후보상 청구와 일본 국회 및 유엔 총회에서 공식사죄,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법적 절차를 준비했다. 진행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근로정신대원인 원고들에 대해 입법의무가 없어서 위자료 지불 의미가 없으며 공식 사죄 의무도 없다는 뜻을 밝혔다. 그렇게 시작된 시모노세키(하관,下關)-‘관’과 부산(釜山)-‘부’를 뜻하는‘관부재판’은 1993년부터 1998년까지 6년간 진행되었다. 김문숙 이사장은 피해자들과 함께 6년 동안 23회에 걸쳐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왕복하며 일본의 강제징용과 인권탄압, 전쟁의 참상, 여성의 피해를 변론하며 일본정부에 맞섰다.

젊은 청년들도 감당하기 힘든 시간들을 60대의 나이에 낮과 밤을 일본을 상대로 투쟁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위안부 관련 자료, 사진, 기록물, 영상물 등을 수집하고 재판청구기록과 재판내용 등 과정의 면면을 기록했다. 그리고 많은 날, 많은 시간을‘위안부’문제로 낮에는 관련 인들을 만나고 밤이면 자료정리로 보냈다. 시민들의 응원과 격려의 글이 도착할 때면 노장의 투혼이 발휘되곤 했다. 그렇게 일본의 전후배상책임과 여성인권탄압의 실상을 고발한‘관부재판’은 기적적으로 1998년 4월 27일 일본 야마구치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재판부의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다.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은 '위안부 피해자 3명에게 각 30만 엔씩 모두 90만 엔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일본 사법부가 처음으로 위안부 책임을 일부 인정한 겁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배춘희 할머니와 김문숙 이사장.
일본군'위안부' 피해 배춘희 할머니와 김문숙 이사장.

사재 털어 개관한 ‘민족과 여성 역사관’

누군가는 말한다. “왜 그렇게 하냐고. 수입이 되지도 않는 일, 힘든 일을 왜 하냐고 묻는다”그러면 김문숙 이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고…”

필자는 김문숙 이사장을 2020년에 수화기의 음성을 통해 만났다. 코로나바이러스로 굳게 닫혀 있는 문밖을 서성이다가 전화로 만난 김문숙 이사장의 음성은 간결하고 힘찼다. 그리고 1년 뒤. 필자는 건강이 악화된 이사장님의 뜻을 이어가고 있는 김주현 관장이 도움을 청하면서 민족과 여성 역사관 내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역사관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김문숙 이사장은 제9회 유관순상 수상, 필자는 제15회 유관순상 수상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성의 역사가 주는 인연이었다.

김문숙 이사장은 2004년에 사재 1억 원을 털어 부산 수영구에 '민족과여성 역사관'을 설립한 뒤 위안부 기록, 재판 기록 등 1000여 점이 전시했다. 95세의 노구에도 역사의 책임을 가슴으로 품으며 버텨낸 시간들이 묻어있는 그곳에 체계적인 자료정리를 위해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팀원들이 나섰다. 피나는 노력이 묻어있는 역사관 앞, 은행나무 잎이 물들어가는 날, 김문숙 이사장의 비보가 전해졌다. 한국 여성인권사에 획을 그은 김문숙 이사장, 그녀의 역사가 곧 대한여성의 역사였고 우리의 역사였다. 역사의 빛이 된 김문숙 이사장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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