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 이야기] 자식종교의 사제같은 삶
[나의 엄마 이야기] 자식종교의 사제같은 삶
  • 박성희 전문위원 / W경제연구소 대표
  • 승인 2021.11.11 14:58
  • 수정 2021-11-11 14: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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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엄마 이야기

이재인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어머니 이종예_씨

 

엄마는 1935년생. 올해 여든여섯이시다. 엄마와 동갑인 노태우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가 TV 화면에 잠깐 비쳤을 때 우린 두 분이 동갑 맞냐고 물었다. 또래 친구들에 비하면 여남은 살은 족히 어려 보이고 사는 모습도 여전히 현역이시니까. 평소는 물론이고 명절 때도 아들딸, 며느리의 도움을 한사코 사양하는 분이 우리 엄마다. 우리 형제는 여전히 엄마의 도움을 받기는 해도 뭘 해드린 적이 거의 없다.

엄마가 이렇게 젊게 사시는 비결이 뭘까? 전에는 예사롭게 여겼지만 나도 나이가 드니 아흔을 바라보는 요즘까지 변함 없이 부지런하고 활력이 넘치는 엄마의 모습에 신기한 생각이 든다. 당신은 9학년이 되기 전에 인생을 정리한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시지만 우리 형제들 중 그 말은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틀림없이 백세청춘하실 거라 굳게 믿는다.

이종예 여사는 경북 청도군 매전면의 산수 아름다운 마을에서 23녀 중 막내로 태어나셨다. 예의범절의 교과서라며 인근동 고을에서 존경 받던 남산 아지매(울 외할머니)의 막둥이였다. 해방 전후 초등교육을 겨우 마치고 여식이라 고등교육을 포기한 채 집안일을 돕다가 24살에 시집 오니 그 후 60여년 간 하루도 한가할 때 없는 고단한 삶이셨다.

홀어머니 슬하에 6남매나 있는 장남 집에 시집올 때 이미 각오했어야 마땅한 일이었겠으나 참으로 일복이 많았다. 시아버지도 안 계신 가난한 시골 농가에 내 손으로 키울 시동생과 시누이만 5남매라 청춘의 엄마는 두 손 두 발을 다 걷어붙이고 그 아이들부터 키우고 공부시켰다. 시누이, 시동생들 다 결혼시키고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는데, 그 새 내 자녀가 6남매나 태어났으니 자식 뒷바라지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우리 형제가 여섯이나 된 것은 딸만 넷 줄줄이 태어나는 바람에 아들을 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6남매를 키우는 게 어떤 것인지 요즘 사람들은 상상도 잘 안 되겠지만 엄마는 성직처럼 이 일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잘 수행하셨고, 자식들을 한결같이 명문대학교와 전문직에 진출시키셨다. 우리 형제들이 대략 성정이 바르고 순해 큰 애를 먹인 기억은 없지만 각자 반듯하게 사회 생활을 하는 것은 엄마의 종교적이라 할 정도의 남다른 정성 덕분이리라. 아무튼 우리 6남매는 자식농사가 시쳇말로 사업성이 좋다는 생각을 무의식 중에 새겼고 결혼 후 배우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들 더 많은 자녀를 낳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주변을 놀라게 했다.

나는 엄마가 무슨 일을 대략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새털같이 많은 날 하루 한 끼도 적당히 거르거나 굼뜨게 게으름 부리며 내놓으신 적이 없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신다고 집안일을 미루거나 남에게 떠넘긴 모습도 본 기억이 없다. 사람인데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싶다. 그러나 엄마는 여섯 자식을 다 키워 시집장가 보내고서야 여행이라는 걸 해보실 정도로 집안일 신전(神殿)’에서 결근도 조퇴도 청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엄마로부터 자식은 일종의 종교고 기도라는 사실을 보고 느끼며 자랐던 게 아닌가 싶다. 자식 뒷바라지가 줄어들 즈음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생활이 불교 신자로서의 종교활동인데, 재가 신자(在家 信者)로서 법회에 참석하고 기도하며 불경공부 하는 모습이 우릴 키울 때의 그 묵묵한 모습과 어찌나 닮았던지 나는 엄마의 종교가 자식 종교의 또 다른 버전으로밖에 안 보인다. 불제자로서의 수행의 중심에도 자식들의 무탈함과 올바름, 그리고 정진과 해탈이 자리하고 있음에 틀림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6남매를 다 키워내신 다음엔 13명이나 되는 손주들 양육 분담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한 녀석 엄마 도움 없이 컸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손이 안 간 손주가 없었다. 딸들이 직장생활을 하느라 부득이하기도 했지만 엄마가 육아에는 최고 전문가시라 미더웠기 때문이다. 우리 형제들은 엄마가 손주 한 명을 키우는 동안 눈치껏 순번을 타내곤 했다.

그러다 이 일도 다 마무리하시니 비로소 노래교실에 다니고 절 공부 하실 짬을 내셨는데 이런 여유도 잠깐이셨다. 아버지가 고령으로 병원 순례를 시작하시니 그 뒷바라지가 또 고스란히 엄마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당신도 칠순의 적지 않은 연세이셨건만 집안일에건 간병일에건 자식 도움 받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신다. 우린 이때 자식들 인생에 폐를 끼치지 않는 게 당신 인생의 최고 최대 목표이신 줄을 깊은 존경심과 함께 전보다 더 확실하게 깨달았다.

엄마의 일생은 책임의 일생이라 할 만하다. 평생 넉넉하지 않은 살림 속에서 돈을 적재적소에 쓰는 솜씨는 누가 감히 흉내 내기 힘들 정도다. 자식들 내외나 손주들 생일에는 카드와 촌지를 챙기고, 집안의 경조사나 법회 때 정성도 빠뜨리지 않으신다. 맏딸인 내가 선출직 도전의 험난한 길에 들어서자 첫번째 후원자를 자임하시며 있는 힘껏 도와주셨다.

출퇴근도 휴가도 없는 가족 돌보미 현역 생활을 완성하시고 당신만의 버킷리스트 인생을 실현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신 지 이제 겨우 3년인 우리 엄마. 자식이든 이웃이든 국가사회든 유익을 찾아 기도처럼 살아오시니 그 일생의 모습이 저희 자식들에게 제일 큰 유산이고 후원입니다. 저 또한 그 길을 따르렵니다. 엄마 사랑해요.

이재인 교수와 어머니 이종예 씨
이재인 교수와 어머니 이종예 씨

 

이재인

대구가톨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사)서울인구포럼 대표 겸 이사장. (재)한국보육진흥원 원장, 대통령실 고용복지 비서관, 여성가족부 여성정책국장 역임. '나는 왜 인구전도사가 되려고 하는가' 등 저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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