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커뮤니티서 ‘감형 팁’ 공유
감경 못 받자 “후원금 반환” 요구도
“양형 감경요소로 ‘기부’ 반영 말아야”

©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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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전담법인이 운영하는 온라인 카페에 ‘양형 자료’의 실효성에 대해 묻는 글이 게시되자, “효과가 있다”는 댓글이 주르륵 달렸다. 성범죄 가해자 전용 커뮤니티인 이곳에서 말하는 양형 자료는 반성문, 기부금 내역서, 헌혈증, 장기기증 서약서, 봉사활동 증명서, 성교육 수강 자료, 심리상담 증명서 등을 가리킨다. 재판부에 이런 자료를 제출하는 것이 ‘감형 전략’이라고 했다. 법조계와 여성단체는 “법원이 면피성 기부와 반성문 등을 ‘진지한 반성’으로 인정하고 있다”며 “양형 기준의 감경요소를 정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난 8일 여성인권운동 단체인 한국여성의전화 후원 계좌에 후원금 1000만원이 입금됐다. 갑작스런 고액의 후원금에 한국여성의전화는 후원 의도를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여성 폭력 관련 범죄의 가해자들이 일부 감형을 받기 위해 여성단체에 금전적 기부를 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수소문한 끝에 입금 은행에까지 연락해 후원 목적을 확인한 단체는 전액을 반환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자체 모금윤리규정에 “여성폭력 가해자가 소송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기부는 받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번 기부 역시 감형을 노린 ‘꼼수’로 알려졌다.

‘기부’해서 감형한다는 법원

지난 2015년을 기점으로 여성단체에 후원하는 여성폭력 가해자들이 늘었다. 이때 ‘여성단체 정기 후원금 납부’를 양형 사유에 포함한 판결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2014년 불법촬영 범죄로 붙잡힌 남성 공무원 A씨에 대해 1심은 300만원 벌금형을 선고했다. 항소심 판단은 달랐다. 서울동부지법은 A씨가 “범행을 자백하며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있는 점, 범죄 전력이 전혀 없는 점, 성폭력 예방프로그램을 자발적으로 수강하고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정기 후원금을 납부하며 다시는 이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점, 피해자들과 합의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 점” 등을 들어 선고유예로 감형했다. A씨는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월 10만원씩 5회 무통장입금으로 ‘일방적인’ 기부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재판이 끝난 뒤에는 1회 더 납부한 후 곧바로 기부를 중단했다.

2019년 미성년자 성폭행 사건 항소심에서도 판사는 가해자에게 유리한 양형 사유로 참작 사유로 ‘기부’를 언급한다. 대구고등법원은 학원 강사였던 가해자가 13세 미만인 제자를 수차례 성폭행하고 추행한 사건을 판결하며 가해자를 징역 12년에서 10년으로 감형했다. 재판부는 양형 사유로 “피고인이 봉사단체에 200만원을 기부한 점”을 들었다.

재판부는 “죄질이 무겁다”, “피해자가 엄벌을 원한다”, “피해자가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면서도 가해자 측이 낸 ‘양형자료’를 판결에 반영해 감형한 것이다.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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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 의도 묻자, “왜 의심해” 버럭

최근 몇 년간 여성운동단체들은 여성폭력 가해자들의 감형 전략에 대응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 후원금 납부와 단체 자원활동을 감형 수단으로 악용하려는 가해자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2015~2017년 집계한 결과, 성폭력 가해자가 기부금을 제안하거나 납부한 것을 확인한 사례는 101건에 이른다.

가해자 측의 기부제안 형태를 살펴보면, 대부분 상담소에 직접 전화해 기부방법을 문의한 뒤, 기부 즉시 기부영수증이 발급되는지를 물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상담소 활동가가 “성폭력 가해로 재판 중이냐”고 물으면 상대방은 얼버무리거나,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화를 내거나 “왜 가해자로 의심하느냐”며 불쾌감도 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과거에는 일시 후원을 한 후 기부영승증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고, 최근에는 정기적으로 소액을 후원하는 경우가 늘었다. 가해자 커뮤니티에서 지속적인 후원을 ‘감형 팁’으로 공유하고 있다. 성폭력 가해자의 여성단체 기부에 대한 비판이 일자, 이들은 여성단체가 아닌 사회복지단체로 눈을 돌리고 있다. 형이 확정되거나 기대보다 감형이 되지 않으면, 후원금을 반환해달라고 요구하는 가해자도 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범죄 유형별로 형량 범위를 감경영역, 기본영역, 가중영역 등 3단계로 권고한다. 기본영역을 기준으로 양형에 참작할만한 요인이 있을 때는 형을 더하거나 줄이도록 하고 있다. 양형위가 권고하는 성폭행(일반강간)의 기본 형량 범위는 ‘2년6월~5년’이다. 이때 ‘특별양형인자’에 해당하는 △피고인의 자수 △처벌불원(피해자와 합의) △심신미약 등의 사유가 인정되면 ‘1년6월~3년’으로 형이 가벼워진다. 여기에 △상당 금액 공탁 △진지한 반성 △형사처벌 전력 없음 등의 ‘일반양형인자’가 추가로 반영되면 선고형량은 더 낮아질 수 있다.

김재남 여성가족부 법률자문관(의정부지방검찰청 부부장검사)이 지난 11월 8일 열린 ‘젠더폭력 범죄와 양형’ 심포지엄에서 공개한 ‘2019 양형위원회 연간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성폭행(일반강간) 사건 878건 중 44.5%가 법정형보다 가벼운 ‘감경영역’이 적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가중영역이 적용된 성폭행 사건은 2.4% 뿐이었다. 13세 미만 대상 성범죄 역시 절반 이상(53.5%)이 감경영역이 적용됐으며 7%만 가중영역이 적용됐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대법원으로부터 제출받은 ‘2019 성폭력 범죄 감경 사유’를 보면, 전체 성범죄(4725건) 중 3420건(70.9%)이 감경사유로 ‘진지한 반성’을 채택했다. 장애인과 13세 미만 청소년 대상 성범죄에서도 65%와 69.2%의 성범죄자들이 ‘진지한 반성’을 인정받았다.

여성단체들은 대법원에 기부를 감경요소에 반영하지 말라며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가해자의 반성 여부를 감경요소로 남발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대필 반성, 컨설팅에 의한 형식적 반성, 꼼수 기부 증빙을 통한 반성을 적극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여성폭력 사건에서 '기부'를 양형의 감경요소로 반영하지 마십시오' 서명 캠페인 (https://url.kr/rqevg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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