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것의 아름다움’ 관심 높아지며
궁중화·문인화에 가렸던 조선 민화 재조명
자유분방한 매력...여성들 중심으로 인기
국내외 전시 이어져...서양화·공예 접목 시도도

온라인 강의 플랫폼 ‘클래스101’에 개설된 민화 그리기 강좌.  ⓒ클래스101 캡처화면
온라인 강의 플랫폼 ‘클래스101’에 개설된 민화 그리기 강좌 중 묵연화실의 강의 안내 화면. ⓒ클래스101 캡처화면

‘우리 그림’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먹의 농담을 조절해 화폭에 자연을 담는 수묵화, 옛 사대부들이 즐겨 그린 사군자와 산수화. 

‘민화’도 빼놓을 수 없다. 궁중화, 문인화에 밀려 푸대접받던 ‘무명씨들의 그림’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미술계에서는 민화를 그리거나 배우는 사람이 최소 30만명, 실제로 활동하는 작가는 약 10만명이 넘을 것으로 본다. 서울 인사동 고미술거리에서는 연일 민화전이 열리고 있다. 인사동에서 민화가 빠지면 갤러리나 표구사 운영이 안 된다는 말도 나온다. 2017년부터 ‘대한민국 민화아트페어’도 매년 개최되고 있다. 코로나19로 올해 행사는 취소됐으나, 2019년 6월 열린 제3회 행사엔 민화작가 약 400명이 참여해 작품 2000여 점을 선보였고, 관람객 약 1만명을 기록했다.

‘화조도’, 19세기작.  ⓒ갤러리현대 제공
화조도, 19세기작. ⓒ갤러리현대 제공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책가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책가도. ⓒ국립중앙박물관

민화란 조선시대 서민들이 생활 속에서 사용하고 즐겼던 그림이다. 우리 미술사 최초로 평범한 백성이 주체가 돼 직접 그리고 향유한 그림이다. 특별한 기술이나 재주 없이도 즐길 수 있는 문화였다. 또 나쁜 액운을 물리치고 복을 구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소망을 담은 그림이다.

조선시대 민화는 일종의 인테리어 소품이자 부적 역할을 했다. 이 마을 저 마을 떠도는 민예화가가 양반이나 부잣집의 주문을 받아 보름쯤 머물며 그 집안의 수복강녕을 염원하는 그림을 그려주면, 병풍으로 삼거나 벽장문, 다락문이나 대문 등에 붙여 보기 좋게 꾸몄다. 안방에는 부부의 좋은 금실과 부귀영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화사한 꽃과 새가 그려진 화조도, 화훼도를 장식했다. 다산을 기원할 때는 석류도 병풍을 세웠다. 책과 문방구류 등을 그린 책가도로 사랑채를 장식해 주인의 고매한 학덕과 학문에 정진하는 마음가짐을 강조했다. 오래 살기를 바라며 장생도를 그려 붙였고, 용이나 호랑이 그림으로 액을 쫓고 용맹함을 나타내기도 했다.

자유롭고 천진하며 재치 있는 표현이 민화의 특징이다. 형식이나 이상향에 얽매이지 않고 화가 개인의 미의식과 감정을 자유분방하게 표현한다. 단순한 선의 표현이 어쩐지 아마추어 같아 보이기도 하나 독특한 개성과 흥취가 느껴진다. 궁중회화, 문인화를 감상할 때처럼 격식을 차리고 그림 속 상징을 읽어내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친근한 마음으로 즐기면 그만이다. 민화를 ‘민주적인 그림’, ‘조선의 그래픽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러나 정식 그림 교육을 받지 못한 무명 화가가 그렸다는 이유로 낙관 하나 찍지 못한, 제작연도조차 모르는 민화 작품이 많다. ‘잡화’, ‘속화’로 불리며 무시당한 세월도 길었다.

민화 전문가인 미술사학자 정병모 경주대 교수는 저서 『민화는 민화다』(다할미디어)에서 “민화는 밝고 명랑한 그림이다. 어느 하나 어두운 구석이 없다. 자연의 순수하고 따듯한 오방색이 그림 속에 빛이 나고, 그 속에 펼쳐진 이야기도 유쾌하지 그지없다”며 “침울한 역사 속의 유쾌한 그림”이라고 평했다. 또 “(민화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화려하고 세련된 기교가 아니라 기교 너머의 자연스러운 질박함에 있다”고 덧붙였다.

엄미금, 여의(如意), 50X50cm 장지 위에 분채 ⓒ엄미금 작가
엄미금, 여의(如意), 50X50cm 장지 위에 분채 ⓒ엄미금 작가
루씨쏜, 제주 창조 ⓒ루씨쏜 작가
루씨쏜, 제주 창조 ⓒ루씨쏜 작가
은지(모모걸, 본명 이은지) 작가의 책 『민화와 소녀 컬러링북 : 신의 아이들』(북핀)에 실린 작품들. ⓒ북핀/은지 작가
은지(모모걸, 본명 이은지) 작가의 책 『민화와 소녀 컬러링북 : 신의 아이들』(북핀)에 실린 작품들. ⓒ북핀/은지 작가

최근 민화를 팝아트 등 서양화, 공예, 디자인과 접목하려는 시도도 눈에 띈다. 정체성 논란도 있지만,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발상과 구성으로 젊은층에게 호평을 받는 작품이 늘었다.

민화 그리기, 민화 도안으로 디자인 소품 만들기 등도 인기다. 7일 기준 온라인 강의 플랫폼 ‘클래스101’에 개설된 민화 그리기 강좌는 20개가 넘는다. 유튜브에서 ‘민화 그리기’를 검색하면 선 긋기, 종이에 아교 섞은 물을 발라 붙여서 밑그림판을 준비하기, 물붓으로 색의 농도 조절하기 등 자세한 설명과 예시 영상이 수백 개 올라와 있다. 2020~2021년 출간된 민화 컬러링북, 기초 안내서도 10여 권이다.

온라인 강의 플랫폼 ‘클래스101’에 개설된 민화 그리기 강좌.  ⓒ클래스101 캡처화면
온라인 강의 플랫폼 ‘클래스101’에 개설된 민화 그리기 강좌. ⓒ클래스101 캡처화면

코로나19로 주춤했던 오프라인 교육도 열기가 뜨겁다. 서울시무형문화재 제18호 민화장 전수조교인 정승희(본명 정귀자) 작가가 서울 종로구 서울무형문화재 돈화문 교육전시장에서 진행하는 ‘전통 민화 그리기’ 프로그램은 수강생들 간 경쟁이 치열하다. 교육 관계자는 “2018년부터 꾸준히 여는 강의인데 늘 가장 빨리 모집이 마감된다. 한국 전통문화에 관심 많은 여성들, 특히 40대 이상 주부들의 관심이 뜨겁다”고 했다.전국 문화센터에서도 다채로운 민화 강좌가 열리고, 수강생들의 작품 전시회도 잇따르고 있다.

홍남희(35·직장인) 씨는 “서양화 위주로 배우고 감상하다가 뒤늦게 동양화의 매력에 눈을 떴다”며 “민화는 소박한 듯 화려하고, 무게를 잡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릴 수 있어서 문턱이 낮다. 그림 초보자들에게도 추천한다”고 했다. 송수현(22·홍익대) 씨는 “민화만의 구도나 채색 기법, 상상력과 유머 감각, 기발한 조형미에 흥미를 느끼고 그리기 시작했다”며 “마음과 소망을 담은 그림이라는 점에서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기에도 좋고, 개인적으로는 디자인 소품으로도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2월 15일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린 '책에서 피어난 그림, 책거리' 전을 찾은 관람객이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2월 15일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린 '책에서 피어난 그림, 책거리' 전을 찾은 관람객이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올해 민화 전시도 풍성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2~4월 책거리(책가도) 특별기획전 ‘책에서 피어난 그림, 책거리’를 열었다. 이 전시는 5월 프랑스 낭트로 옮겨져 ‘한국의 봄’ 축제, 프랑스한국문화원에서도 관람객들과 만났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지난 7~10월 특별전 ‘안녕, 모란’을 열고 모란꽃 문양을 활용한 궁중화, 민화 등 유물 120여 점을 대거 공개했다. 경남도립미술관은 6~10월 근대현대미술기획전 ‘황혜홀혜(恍兮惚兮)’를 열고 조선 민화, 회화 등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였다. 인천시립송암미술관은 6~11월 조선민화 특별전 ‘민화, 비밀의 화원을 품다’를 열고 화조도, 영모도, 어해도 등 다양한 민화 작품을 전시했다. 포스코미술관은 9~10월 ‘미물완상(美物玩賞)-조선, 색으로 장식하다’ 전시를 열고 일월오봉도, 십장생도, 화조도, 수렵도, 문자도 등을 전시했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은 2019년에 이어 지난 10월 현대민화 작가 29인의 작품을 모은 ‘민화의 비상(飛上) - 제2장. 민화 그리고 표현주의’ 전을 개최했다.

원로·중견 민화 작가들의 전시도 이어진다. 지난 5월 원로 민화 작가 송규태 화백이 동덕아트갤러리에서 초대전을 열었다. 예범 박수학 작가, 설촌 정하정 작가가 개인전과 사제동행전을 열었고, 백당 금광복 작가, 효천 엄재권 작가가 회고전을 열었다. 조선민화 상설 전시관인 갤러리 조선민화는 4~5월 ‘민화 프론티어’ 전을 열었다. 김상철, 윤인수, 이정동, 정하정, 금광복, 박수학, 이문성, 고광준, 김용기, 이규완, 정승희 등 한국 현대 민화화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 11명의 신작을 소개했다. 인사아트센터는 15일부터 정오경 작가의 ‘우리민화전’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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