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이야기

홍빛나 경희대 연구교수
엄마 김정희 씨

엄마가 되기 위해서 대부분은 먼저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어야 한다. 23살 엄마는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었으며 24살 엄마가 되었다. 지금도 엄마는 ‘그때 뭘 안다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았는지...’라는 말씀을 종종 하신다. 그래도 대부분의 여자들은 아내의 역할도 며느리의 역할도 엄마의 역할도 묵묵히 그리고 꽤 성공적으로 잘 수행해 나가는 것 같다.

우리 엄마도 부잣집 딸에서 가진 거 없이 직장만 든든한 아빠를 만나 단칸방에서도 불평 없이 아내로서, 엄마로서 잘 지내셨던 것 같다. 아이들은 커나가고 살림은 조금씩 불어갔으며 그러면서 엄마의 행복도 함께 켜졌던 것 같다. 46살. 두 딸은 대학생이 되었고, 남편의 사업도 잘 되었다. 엄마도 종교 활동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면서 그동안의 자식 뒷바라지에서 벗어나 본인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그러던 어느 가을날 엄마는 대야 한가득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아빠를 마주했다. 119를 불러 병원에 가면서 그 작은 가슴이 얼마나 터질 듯 뛰었을지... 아빠는 간경화 말기였으며, 위 정맥이 터져 자칫 대응이 늦었다면 과다출혈로 사망할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을 지나고 있었다. 엄마는 밤새 응급실에서 아빠 곁을 떠나지 않았다. 위에 가득 찬 피는 혈변으로 쏟아졌다. 그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딸인 나는 응급실 밖으로 도망치듯 나왔는데, 그때도 엄마는 묵묵히 아빠의 뒤처리를 하고 계셨다.

아빠는 그때부터 간경화 말기 환자의 고통스런 투병생활을 하셨다. 간이 제 기능을 못하자 몸의 정화능력은 떨어졌고 모든 장기에서 이상반응이 나타났다. 위 정맥이나 식도 정맥이 1년에 두세 번씩 터져서 응급실로 달려야 했다. 복수가 차서 숨을 헐떡거리며 고통스러워 하는 아빠를 엄마는 온 정성으로 돌보셨다.

50살. 아빠는 간암이 발병했고, 우리 가족은 중대한 결정을 해야 했다. 큰 딸인 내가 아빠에게 간이식을 하기로. 엄마는 반대하셨다. 아빠의 생명도 중요했지만 딸의 몸에 칼을 댄다는 사실이 너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때 내 나이가 27살이었다. 나는 수술하겠다고 했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끝났다. 수술 후 중환자실에 있는 나를 보자마자 엄마는 내 손을 꼭 잡았고 난 그게 너무 아파서 손을 뿌리쳤는데, 엄마가 많이 우셨다고 했다.

너무 미안하고 미안한데, 내가 수술한 것에 대해 원망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너무 미안했다고. 난 그냥 손이 아파서 뺏던 것뿐인데, 엄마의 마음이 그렇게 해석했던 것 같다. 엄마의 정성이었는지 아빠도 나도 잘 회복했다. 5년 더 살리자고 한 수술이었는데 아빠는 현재까지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신다. 엄마는 약 7년에 걸친 아빠의 병간호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다시 본인 생활을 시작하셨다. 아직 엄마가 젊다는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55살.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암이래, 갑상선암. 언니 괜찮겠지?” 동생은 떨고 있었다. “야, 우리가족은 더 큰 일도 겪었어. 갑상선암은 해피한 암이래. 괜찮을 거야”라고 위로하며 전화를 끊고 난 한참 멍하니 있었다. 아빠가 아프실 때는 엄마가 다 해결해 주셨기에 우린 아무것도 할 게 없었는데, 엄마가 아프면... 아빠는 누가 챙기고, 집안 살림은 누가하고, 심지어 내방 정리, 내 옷 빨래는 누가하지?

아, 그때 알았다. 엄마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한참을 울었다. 너무 미안해서. 엄마의 희생은 당연한 줄 알고 그 동안 감사도 모르고 어쩌면 엄마에게 강요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너무 미안했다. 엄마는 수술과 항암치료를 모두 잘 이겨내셨고, 우리 가족은 엄마의 빈 자리를 열심히 메꿔가며 엄마의 회복을 도왔다. ‘회복되면 진짜 엄마도 잘 챙겨야지!’를 되뇌이며 엄마의 회복을 기다렸다. 다행히 엄마도 잘 회복하셨다. 그 뒤로 엄마는 주 5일 외출하며 본인에게 주어진 건강과 시간을 감사하며 하루하루 의미 있게 살기 위해 노력하셨던 것 같다. 그 사이 난 결혼을 했고.

 

 

61살 엄마의 환갑이다. 젊고 예뻤다. 난 임신 7개월로 엄마의 환갑을 축하해드렸다. 엄마는 첫 손주를 기다리는 한편으로 손주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걱정하시는 눈치였다. 나도 첫 아기라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고. 벚꽃이 한창이던 4월 드디어 첫 손주가 태어났다. 엄마는 새벽같이 병실로 오셔서 단 1분도 아기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쩜 이렇게 예쁜 아기가 있을 수 있니? 넌 도대체 어디서 왔니?” 손주를 만나기 전 걱정 두려움은 다 없어지고, 그때부터 엄마는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손주를 돌보는 일에만 매달렸다. 산후조리가 끝나고 내가 다시 일을 시작할 때도 엄마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당연하다는 듯 손주를 키워주셨다. 그리고 5년 뒤 두 번째 손주를 맞이하셨다.

큰 아이가 유치원도 다니고 손이 덜 필요하자, 엄마는 당연하다는 듯 두 번째 손주를 능숙하게 키워주셨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 난 계획에도 없던 세 번째 아기가 생겼다. 엄마는 진심으로 좌절하셨다. 나도 너무 미안했지만, 내게 온 아기를 포기할 수 없어 예쁜 딸을 세 번째 손주로 엄마에게 안겨드렸다. 엄마는 순리라는 듯 자연스레 세 번째 손주를 돌봐주고 계신다.

70살, 이제 곧 엄마의 칠순이다. 아빠와 본인의 투병 10년을 지나 엄마의 60대는 오직 육아뿐이었다. 엄마는 그래도 아이들 보며 웃으며 살아왔으니 괜찮다고 하시지만 너무 미안하다. 그리고 너무 감사하다. 내가 공부를 하고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될 수 있었던 건 나에게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미안하고 고마워요.

24살에 시작된 엄마의 삶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보니 이제 알겠다. 엄마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세상에 하나의 생명을 내어 놓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엄마들은 세상을 품고 있다. 우린 모두 누군가의 자식들이고 그건 누군가의 무한책임 하에 보호받고 있다는 의미일 거다.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우린 엄마의 품에서 살고 있다. 엄마 이야기를 쓰는 것만으로도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엄마의 힘인 거 같다. 엄마...

필자 홍빛나 경희대 연구교수 
건강한귀연구소 소장
한국청각언어재활학회 이사
한국청능사자격검정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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