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계엄법 위반 혐의 징역 1년
41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 판결
재판부 “헌정 파괴에 대항한 정당 행위”
아들 전태삼 “군부의 만행 기억하길”

1970년 11월 18일 전태일의 장례식에서 아들의 영정 사진을 안고 있는 이소선 여사. ⓒ전태일기념관 제공
1970년 11월 18일 전태일의 장례식에서 아들의 영정 사진을 안고 있는 이소선 여사. ⓒ전태일기념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여성노동운동가인 고 이소선 여사가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전두환 정권 시절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증언하다 붙잡혔던 이 여사는 군사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지 41년 만에 명예를 되찾았다.

서울북부지법 형사5단독 홍순욱 부장판사는 21일 전두환 정권 때 계엄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이 여사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공소 사실이 발생한 때는 전두환 군부가 민주항쟁 이후 전국적으로 활발히 전개되던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을 더 강하게 탄압하려던 시기”라며 “피고인이 대학생 시국 농성과 노동자 집회에 참석해 시위한 행위는 시기, 목적, 대상, 사용수단 등에 비춰볼 때 1979년 12월 12일부터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해 발생한 헌정파괴 범죄에 대항해 시민이 전개한 민주화운동 및 헌법상 정당행위에 해당해 범죄가 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옥상에서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선 이소선 여사. ⓒ전태일기념관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옥상에서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선 이소선 여사. ⓒ전태일기념관

이 여사는 1980년 5월 4일 고려대학교 도서관에서 열린 시국성토대회에서 학생 500여명에게 자신이 주도한 청계피복노동조합 결성 경위를 설명하며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에 대해 연설했다. 이어 같은 달 9일 영등포구 한국노총 회관에서 신군부의 쿠데타 음모를 규탄하며 ‘노동 3권 보장’,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복직’ 등 구호를 외쳤다. 계엄 당국은 해당 집회가 사전에 허가받지 않은 ‘불법집회’라는 이유로 이 여사를 지명수배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했다. 같은 해 12월 수도경비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는 이 여사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다만 형 집행은 관할 사령관의 재량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태삼씨는 이날 재판이 끝난 뒤 “참담하고 억울하다”는 심경을 밝혔다. 그는 “당시 강제징집된 후 행방불명돼 시신조차 찾지 못하는 학생들이 6000명이 넘는데, 오늘의 무죄 판결이 그들에겐 무슨 도움이 되겠나”라며 “어머니를 체포하고 군사재판에 회부한 군부의 만행을 국민들이 다시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태일재단도 성명을 내고 “무죄 판결은 당연한 결과”라며 “국가의 판결은 늦었지만 환영한다”고 밝혔다. 또 “군사정권에 항거한 노동자, 학생, 시민의 명예 회복이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앞서 검찰은 지난 4월 과거 계엄법 위반 등 혐의로 처벌받은 이 여사 등 민주화 운동가 5명에 대한 직권 재심을 청구했다. 서울북부지검 형사5부(부장 서인선)는 “전두환이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으로 군 지휘권을 장악한 뒤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저지른 일련의 행위는 헌정질서 파괴 범죄”라며 “피고인의 행위는 헌헌정질서 파괴의 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한 행위로 평가된다”며 무죄를 구형했다. 

 

<‘노동자의 어머니’이자 ‘여성노동 운동가’ 이소선 여사>

1970년 11월 13일, 22살의 봉제노동자 전태일 열사는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스스로 몸을 태웠다. 아들은 임종 직전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 주세요.” 이 여사는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게”라고 약속했다. 아들의 유언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을,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으로 바꾼 계기가 됐다. 이후 41년간 이 여사는 아들이 꿈꾼 세상을 만드는 데 투신했다. 

2009년 11월 8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민주노총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이소선 여사가 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2009년 11월 8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민주노총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이소선 여사가 발언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한국 민주노조 운동의 상징인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설립했고 1970년대 동일방직과 YH무역 노동자 투쟁에 나섰다. 박종철 고문치사 진상규명에 나섰고 민주화 운동 중 희생된 이들의 유가족들과 함께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의문사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 쌍용차 정리해고 투쟁 등 굵직한 노동 현장에는 늘 이 여사가 중심을 지켰다. 그동안 4차례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말년까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 함께했다. 그는 2011년 7월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걱정하며 3차 희망버스를 기다리던 중 쓰러졌고 그 해 9월 3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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