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엔 달라져야 할 것들]
69년째 그대로인 형법상 ‘강간죄’
폭행·협박 있어야 성립…현실 괴리 심해
피해자 역고소·2차가해 악용도
‘저항했냐’ 대신 ‘동의했냐’ 물어야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단체 활동가들이 2019년 9월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앞에서 열린 강간죄구성요건의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단체 활동가들이 2019년 9월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앞에서 열린 강간죄구성요건의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대한민국에선 성관계를 강요한 사람 모두가 강간죄로 처벌받지 않는다. ‘피해자의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할 정도에 이르는’ 폭행 또는 협박이 존재해야만, 형법상 강간죄와 유사강간죄를 물을 수 있다. 강간죄 성립 요건을 매우 좁게 해석하는 ‘최협의(最狹義)설’ 탓이다.

여성계는 현행 강간죄가 성폭력 피해자의 입을 막고 2차 피해를 유발하므로 ‘가해자가 피해자의 적극적인 동의를 얻었는지’를 기준으로 삼자고 요구해왔다. 국회도 움직였다. 2020년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죄 구성요건을 변경하는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그러나 모두 1년이 넘도록 국회 상임위 문턱도 못 넘은 채 잊혀가고 있다. 이대로는 여야 5개 정당 모두 ‘비동의 강간죄’를 신설한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임기 만료로 폐기된 20대 국회의 전철을 밟게 될지 모른다.

전국 성폭력상담소가 접수한 강간(유사강간 포함) 상담 사례의 71.4%(735명)는 폭행·협박이 없었다(2019년 1~3월 상담소 66곳 사례 분석). 그런데도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수사·재판 과정에서 ‘폭행·협박의 증거를 보이라’는 압박을 받는다. 재판부마다 판결이 오락가락한 것도 문제다. 유죄가 확정된 ‘안희정 위력 성폭력’ 사건도 1심에선 ‘위력 행사 증거가 없다’며 무죄 판결이 나왔다.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죄를 묻는다면 성폭력 무고가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실제론 폭행·협박 증거 없이 피해를 신고했다는 이유로 동기를 의심받고 무고로 역고소당하는 피해자들이 많다. 통계를 봐도 억측에 가깝다. 2017~2018년 검찰의 성폭력 사건 처리 인원 7만1740명(중복 제외) 중 무고로 기소된 사례는 0.78%(556명), 유죄 선고는 0.42%(341명)뿐이다. 그런데도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청년 정책’이라며 성폭력처벌법에 무고죄 신설·처벌 강화를 공약해 비난을 샀다.

비동의 강간죄 개정은 국제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유엔(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8년 한국 정부에 “성폭력 범죄의 정의를 ‘피해자의 자유로운 동의 없음’을 중심으로 개정”하라고 권고했다. 영국, 독일, 아일랜드, 호주, 미국(11개 주) 등 여러 선진국도 비동의 강간죄를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주요 대선후보 중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공약한 후보는 심상정 정의당 후보 한 명뿐이다.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2019년 7월 25일 여성신문 기고에서 비동의 강간죄는 “성폭력 범죄의 보호법익인 성적 자기결정권을 ‘상호 동의와 이해에 기초한 민주적 토대’ 위에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며 “폭행과 협박을 요구하던 방식에서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성폭력 여부를 판단하게 되면, 성폭력과 무고 사이는 지금보다 훨씬 멀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1953년 첫 형법 제정 이래 한 번도 바뀌지 않은 강간죄, 새 시대에 맞게 고치는 일을 더 미뤄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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