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화영상진흥원 ‘2021 우수만화도서’ 살펴보니
여성이 쓰고 그린 화제작 다수
정년이·극락왕생 등 드라마화 확정작도

(왼쪽부터) 디담·브장 『나, 여기 있어요』, 작가1 『B의 일기』, 고사리박사 『극락왕생』, 샤이앤 『내 이름은 샤이앤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여성신문
(왼쪽부터) 디담·브장 『나, 여기 있어요』, 작가1 『B의 일기』, 고사리박사 『극락왕생』, 샤이앤 『내 이름은 샤이앤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여성신문

초능력·비혼·탈코르셋·여성연대...한국만화영상진흥원(원장 신종철)이 지난달 선정, 발표한 ‘2021 우수만화도서 50종’엔 여성이 쓰고 그린, 틀을 깨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가 다수다. 

가부장제·여성혐오에 저항하는 페미니즘의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 많다. ‘작가1’의 『B의 일기』는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가부장제의 압력과 이에 대항해 비혼을 택한 여성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을 통해 처음 페미니즘을 접했다는 작가는 ‘탈코르셋’ 운동을 그린 만화 『탈코일기』로 화제에 올랐다. 『B의 일기』는 그 후속작으로, 『탈코일기』 주인공 ‘도수리’의 과거를 그렸다.

‘작가1’의 『B의 일기』 ⓒ북로그컴퍼니
‘작가1’의 『B의 일기』 ⓒ북로그컴퍼니
수신지 작가의 『곤』 ⓒ귤프레스
수신지 작가의 『곤』 ⓒ귤프레스

수신지 작가의 『곤』은 ‘낙태죄’ 합헌 판결이 내려진 가상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 번이라도 임신중지를 한 적 있는 여성들이 처벌을 받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동글동글 귀여운 그림체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얼마나 보장되고 있는지 가볍지 않은 물음을 던진다. 전작 『며느라기』로 ‘2017 오늘의 우리만화’에 선정됐고, 한국만화가협회장상(2017), 올해의 성평등문화상 부문 청강문화상(2018), 2018 대한민국 콘텐츠대상 문화체육부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프랑스의 만화가·일러스트레이터인 오드 메르미오 작가의 『나의 임신중지 이야기』는 작가가 임신중지를 결정하고 시술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그래픽노블로 옮겼다. 임신중지를 결심한 여성이 겪는 복잡한 내면과 심리 변화를 세세하게 묘사했다. 임신중지 시술을 하면서 여성들을 이해하고 연대하게 되는 남성 의사를 포함해 곁에서 힘이 돼 준 이들의 이야기도 담았다.

용감하게 젠더폭력을 고발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들도 눈에 띈다. 디담·브장 작가의 『나, 여기 있어요』는 2014년 만화계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직접 그리고 쓴 자전적 작품이다. 유명 남성 웹툰 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간 여성 주인공이 온갖 모욕과 성추행, 폭력을 겪고 소송에 나서면서 겪는 일들을 그렸다.

구정인 작가의 『비밀을 말할 시간』은 중학생 은서가 7세 때 낯선 사람에게 겪은 성추행 사건을 9년에 걸쳐 스스로 극복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생존자의 목소리를 전면에 내세워 아동 성폭력의 심각성을 알리는 동시에,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자기를 긍정하며 성장하는 여성 청소년 서사다. 구 작가는 첫 만화책 『기분이 없는 기분』으로 2019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우수만화에 올라 평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서이레(글), 나몬(그림) 작가가 네이버웹툰에서 연재 중인 『정년이』 ⓒ네이버웹툰
서이레(글), 나몬(그림) 작가가 네이버웹툰에서 연재 중인 『정년이』 ⓒ네이버웹툰
고사리박사 작가의 『극락왕생』 ⓒ문학동네
고사리박사 작가의 『극락왕생』 ⓒ문학동네

다양한 여성들의 모험과 성장, 연대를 그린 만화들도 대거 선정됐다. 서이레·나몬 작가의 『정년이』는 1950년대에 많은 인기를 끌었던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다. ‘여성 공동체’ 국극단을 배경으로 여성의 야망과 분투, 여성들 간 사랑과 갈등, 연대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2019 오늘의 우리 만화상’, 웹툰 최초로 ‘2020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 문화콘텐츠 부문 등을 수상했다. 네이버웹툰 자회사 스튜디오N이 드라마화에 나섰다.

고사리박사 작가의 『극락왕생』은 죽었다 살아난 여성 주인공 박자언이 고3으로 돌아가 1년 간 귀신을 도우며 자신에게 가장 중요했던 한 해를 반추하는 이야기다. 한국적 세계관, 탄탄한 스토리, 개성적인 여성 주인공들로 주목받았다. 2019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고 역시 드라마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말랑, 샤이앤 작가의 『내 이름은 말랑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와 『내 이름은 샤이앤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는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트랜스젠더의 삶과 감정을 생생하게 그렸다. 작가들이 일상에서 겪은 혐오와 갈등, 가족의 사랑과 지지에서 힘을 얻은 순간도 담았다. 병원 상담부터 수술, 관리까지 트랜지션 과정, 법원에 성별 정정 허가 신청하는 법 등 작가들이 직접 부딪히며 터득한 정보와 팁도 전한다.

『여자력』은 젊은 만화가 5팀이 펴낸 단편 만화집이다. AJS, 골왕&자룡, 고사리박사, 김이랑, 뼈와피와살 작가가 ‘초능력’을 주제로 무협, 디스토피아, 판타지, 청춘, 드라마까지 다채로운 상상력을 보여준다. 남다른 능력을 가진 여성 주인공들이 갈등, 용기, 도전을 통해 진정한 자신으로 거듭나는 내용을 담았다.

김정연 작가의 『이세린 가이드』는 음식 모형 제작자 이세린의 이야기다. 15가지 음식 모형을 만들며 각 음식에 얽힌 사연, 주인공의 경험과 생각을 생생하게 풀어낸다. ‘고명딸’의 삶과 가부장제 이야기, 한국 여성의 현실에 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곁들인다.

김금숙 작가의 그래픽노블 『개』, 미발표 데뷔작 『이방인』도 이번 명단에 올랐다. 김 작가는 한국전쟁, 제주 4·3사건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성 짙은 만화를 주로 그렸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그래픽노블 『풀』로 2020년 만화계의 오스카 ‘하비상’을 수상했다. 『개』는 작가와 강아지 세 마리의 시골 생활에 기초한 만화다. 인간과 개와의 교감, 반려동물과 사람들의 사랑과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특유의 회화적인 화풍으로 그려 호평을 받았다. 『이방인』은 프랑스에서 만나 결혼한 지수와 프레드릭이 일상적으로 겪는 문화 차이로 인한 갈등과 화해를 그린다.

류승희 작가의 어린이 만화 『검정마녀 미루』는 이사간 동네에서 검정마녀를 만나면서 남자아이는 마녀가 될 수 없다는 편견에 도전하기로 한 남자아이 ‘미루’의 이야기다.

무적핑크 작가의 역사만화 『세계사톡』도 선정됐다. 역사 속 인물들이 메신저를 통해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콘셉트다. 작가와 여러 스태프가 참여한 레이블 ‘핑크잼’의 첫 프로젝트다. 방대한 세계사를 시기별로 나눠, 같은 시기에 동서양과 한국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동시에 살펴본다.

김성희·김수박 작가의 『문 밖의 사람들』은 2016년 스마트폰을 만드는 대기업 하청공장에서 파견 노동자로 일하다가 시력을 잃은 청년의 이야기를 그린 르포 만화책이다. 사회성 짙은 만화를 주로 그려온 두 작가가 의기투합해 만든 첫 프로젝트다. 산업재해와 노동 인권이 결코 먼 문제가 아님을 전한다.

김소희 작가의 『자리』는 가난한 20대 예술가 지망생 송이와 순이가 미대 졸업 후 독립해 작가가 되기까지 7년 동안 열 번 이사하며 거쳐 간 집들과 사람들의 이야기다. 청년 주거 문제, 예술인 복지 등 사회 문제를 다루면서도 청춘의 꿈과 희망, 우정에 주목한다.

스웨덴 출신 오사 게렌발 작가의 『돼지』는 자존감이 낮고 오만하며 공격적 성향을 지닌 청년 ‘단’이 주변 여성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그렸다. 외로움, 불안, 여성 학대, 파괴적 관계 등 인생의 어두운 단면을 날카롭고 냉소적으로 포착했다는 평을 받았다.

진흥원은 2020년 9월 1일부터 2021년 8월 31일까지 출간된 한국어 만화 단행본 1500여 종 중, 작품의 완성도, 작품성, 대중성 등을 판단해 50종을 엄선했다고 밝혔다. 여성 작가들의 작품 외에도 인기 웹소설 『나 혼자만 레벨업』(장성락·현군·추공), 『귀멸의 칼날』(고토게 코요하루), 『엘 데포』(시시 벨) 등 그래픽노블부터 노블코믹스까지 다양한 작품이 선정됐다. 『지옥』(연상호·최규석), 『D.P 개의 날』(김보통), 『유미의 세포들』(이동건)처럼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된 원천IP 작품들, 『전지적 독자 시점』(슬리피-C·UMI·싱숑) 같이 웹소설로 먼저 사랑받다가 만화로 제작된 노블코믹스 작품들이 강세였다. 진흥원은 각 작품별 추천사가 담긴 선정작 소개 자료를 PDF로 제작, 디지털만화규장각 홈페이지(dml.komacon.kr)와 전국 공공도서관에 게재·배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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