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순이’? 잊혀진 ‘제2의 전태일들’ 이야기
‘공순이’? 잊혀진 ‘제2의 전태일들’ 이야기
  • 이세아 기자
  • 승인 2022.01.13 09:00
  • 수정 2022-01-14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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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출연한 이숙희씨와 이혁래·김정영 감독
70년대 청계피복노조 활동한
평화시장 여성 노동자들의 희로애락 그려
지난 10일 오후 청계6가 평화시장 앞 버들다리(전태일다리)에서 만난 이숙희씨와 이혁래·김정영 감독. ⓒ홍수형 기자
지난 10일 오후 청계6가 평화시장 앞 버들다리(전태일다리)에서 만난 이숙희씨와 이혁래·김정영 감독. ⓒ홍수형 기자

사람들은 그들이 ‘평범한 아줌마’라고 생각했다. 아파트 분양 사기로 괴로워하는 주민들 앞에서 “함께 건설사에 맞서자”고 설득하고 농성 방법을 교육하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공무원 노조에 가입하겠다는 아들에게 “잘 생각했다, 후배들 권리를 지키려면 네가 공부해야지”라며 노동 3권을 줄줄 설명하는 어머니에게 놀라기 전까지는.

“우리가 우리 이야기를 한 적이 드물어요. 책을 쓰고 싶었는데 다큐 출연 제안에 하겠다고 했어요. 열심히 활동했지만 호명되지 못한 많은 노동조합원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어요. 자부심을 느끼게 해 주고 싶어요.” (이숙희 씨)

20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감독 이혁래·김정영)은 노동인권에 눈을 뜨며 성장하고 연대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1970년대 평화시장 여성 노동자들이다. ‘불쌍한 여공’이 아니라 어린 여성들이 노조 활동으로 얻은 삶의 변화와 희로애락에 주목한다.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공식 초청작이다. 봉준호, 박찬욱 감독 등 영화계 인사들도 호평했다. 

중학교도 못 가고 ‘평화시장 시다’ 된 소녀들
노동교실 다니며 존중받는 삶 깨달아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감독 이혁래·김정영)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감독 이혁래·김정영)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섬유·의류 산업은 1970년대 한국 경제의 한 축이었다. 섬유 제품이 전체 수출액의 약 30%를 차지했다. 국내에서도 값싸고 질 좋은 의류 수요가 높았다. 봉제공장이 밀집한 평화시장(현 동대문 일대)은 수많은 저임금 노동력을 끌어들였다.

여성 노동자들이 떠받쳐온 산업이다. 전태일과 그의 친구들이 1970년 조사해보니, 평화시장 노동자 2만6800명 중 85.9%가 14~24세 여성이었다. 그중 절반이 18세 미만이었다(전순옥, 2004).

이숙희(68)씨도 열여섯에 시다가 됐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공장에 왔다. ‘1년만 기술을 배우고 돈 벌어서 학교 간다’는 계획이었다. 현실을 몰랐다. 어두침침한 오렌지색 형광등이 달린 공장이 첫 직장이었다. 먼지와 악취가 가득한 비좁은 공간에서 등을 구부린 채 일하다 점심시간 옥상에 오르면 “눈이 부셔서 뜰 수 없”을 정도였다. 시다들은 미싱사나 재단사를 도와 다리미질, 실밥 뜯기, 실과 단추 나르기, 잔심부름 등 중노동을 했다. 한 달에 고작 이틀을 쉬고 하루 15시간씩 일하는 지독한 장시간·저임금 노동이었다.

그러다 청계피복노동조합을 만났다. 1970년 11월 전태일의 죽음 이후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형제·친구들이 만든 노조다. 평화시장 옥상에 노조 사무실이 있었다. 가난으로 학업을 잇지 못한 노동자들이 무료로 중등 교육과정을 받을 수 있게 했다. 7평짜리 교실을 열자 200명이 지원할 만큼 열기가 뜨거웠다. 1975년 근처 유림빌딩에 ‘노동교실’을 열고 본격적으로 교육 활동을 했다.

청계피복노조 시절 신순애씨가 쓴 글 ⓒ신순애씨 제공
청계피복노조 시절 신순애씨가 쓴 글 ⓒ신순애씨 제공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감독 이혁래·김정영)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감독 이혁래·김정영)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왼쪽에서 두 번째) 청계피복노조가 운영하는 노동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이숙희 씨. ⓒ이숙희 씨 제공
(왼쪽에서 두 번째) 청계피복노조가 운영하는 노동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이숙희 씨. ⓒ이숙희 씨 제공

늘 외롭고 배움이 고팠던 여성 노동자들에겐 소중한 공간이었다. 학교이자 놀이터, 또래와 어울릴 수 있는 곳이었다. 미싱 번호대로 ‘1번 시다’, ‘1번 미싱사’로만 불렸던 이들의 진짜 이름을 불러주는 곳이었다. ‘공순이’가 아니라 어엿한 기술자, 노동자로 존중받는 곳이었다. 국어, 역사, 한자, 은행 이용법도 배웠다. 함께 노래하고 춤췄고 여행도 다녀왔다. ‘하루 8시간 노동’이 명시된 근로기준법을 배웠고, 좁고 먼지 날리는 공장에서 일하다 폐병에 걸리는 일, 사장이 일방적으로 공임을 정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청계피복노조는 치열하게 싸웠다. 미싱사가 시다 월급을 자기 몫에서 떼어 주는 게 아니라, 사장이 주도록 하는 ‘시다 임금 직불제’를 쟁취했다. 퇴근시간도 밤 10~11시에서 저녁 8시로 앞당겼다. 임금 협정을 통해 공임을 30% 올리고 공임 책정 기준도 정했다. 진보 지식인들과 교류도 늘리면서 당대 민주노동운동의 선봉으로 떠올랐다. 1980년엔 16인 이상 사업장에서만 지급하던 퇴직금을 10인 이상 사업장에서도 주도록 했다. 근로기준법보다 더 나아간 성취였다. 완전히 실현하진 못했지만 밤샘 농성 끝에 사주들로부터 작업 시간 단축도 약속받았다.

공장 사측과 박정희 정권이 노조를 탄압하며 노동교실부터 폐쇄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여성 노동자들은 격렬히 저항했다. 이소선 여사가 구속되고 노동교실을 빼앗길 위기에 놓인 1977년 9월 9일, 교실에 모인 노조원들은 뼈가 부러지고 피를 흘리면서도 경찰에 맞섰다. “제2의 전태일이 되겠다”며 투신을 시도했던 임미경씨, 당시 노조 간부로서 선두에 섰던 이숙희 교육선전부장, 신순애씨 등은 구속돼 약 1년간 옥살이를 했다.

독재정권 탄압에 뿔뿔이 흩어져 
“잊혀져간 노조원들 이름 불러주고파...자부심 느끼길”

노동교실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지고, 전두환 정부가 1981년 청계피복노조를 강제 해산하면서 많은 노조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 헤어진 여성들 다수는 지금까지도 연락이 닿지 않는다. 격동의 70년대 평화시장 노동운동사에 여성의 이름이 많이 남지 않은 이유다.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고작 10대인데 경찰서에 끌려가서 ‘빨갱이 같은 X아’ 폭언에 폭행, 성폭력... 형사가 집과 직장까지 쫓아다니면서 감시했어요. 취직도 안 되고 비난받았죠. 저도 노조 활동하며 많이 두들겨 맞고 울었어요. 제가 활동하는 걸 싫어하는 가족이 있어서 이번 영화를 찍었다고 아직도 말하지 않았어요.” 이숙희씨의 말에 좌중이 잠깐 숙연해졌다.

그는 노동운동 현장에 남았다. 청계피복노조의 옛 조합원들이 전태일의 정신을 기리고자 만든 전태일재단에서 교육위원장으로 일하며 전태일과 노동인권 교육 해설사를 양성하고 있다. 학교 안 청소년을 대상으로 기본적인 노동인권과 법제도를 가르치는 교육이다.

지난 10일 오후 평화시장 2층 명보다방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왼쪽부터) 김정영 감독, 이숙희씨, 이혁래 감독. 전태일이 생전에 친구들과 즐겨 찾았다는 다방이다. ⓒ홍수형 기자
지난 10일 오후 평화시장 2층 명보다방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왼쪽부터) 김정영 감독, 이숙희씨, 이혁래 감독. 전태일이 생전에 친구들과 즐겨 찾았다는 다방이다. ⓒ홍수형 기자

이숙희씨와 감독들은 이 영화가 ‘수동적이고 불쌍한’ 여성 봉제 노동자 이미지를 깰 수 있기를, 더 많은 노동자들이 자부심을 갖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많은 이들이 평화시장 근무 경력을 알리기 싫어해요. 지금이야 옷 만든다, 미싱 탄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저희 때만 해도 ‘얼마나 가난하면 자식을 공장에 보내냐’, ‘못 배운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심했죠. 그렇다고 그들의 이야기가 알려지지 않는 것은 안타까워요. 이번 영화를 계기로 40년 만에 그 시절 동지 몇을 만났어요. 다같이 모여서 어떻게 사는지 안부를 묻고 따뜻하게 안아줄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내가 참 열심히 살았구나’ 위안받고 자부심을 느끼길 바라요.” (이숙희씨)

“섭외가 어려웠는데, 막상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부터 선생님들이 ‘방언 터지듯이’ 말씀하시는 걸 보고 놀랐어요. 그분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잘 전달하는 게 목표예요. 우리 영화가 잊혀지고 가려진 여성 노동자들을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 영화를 얻으면서 큰 용기를 얻었어요. 관객분들도 겸허한 마음,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김정영 감독)

“이름 없는 평화시장 시다들의 이야기를 꼭 전하고 싶었어요.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을 다룬 영화는 아니지만, 당사자들에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어요. 그래서 인터뷰이들의 속 이야기, 표정 등을 자연스럽게 포착하려 많은 공을 들였고 좋은 결과물이 나온 것 같아요. 또 치열하게, 잘 살아간 분들의 이야기잖아요. 오늘날 외롭고 힘든 젊은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도 잘살았고, 지금 너희도, 아무도 잘 알아주지 않아도 굉장히 잘살고 있어, 응원할게’라는 메시지를 전달받는다면 좋겠어요.” (이혁래 감독)

“노조를 모르는 10대에겐 왜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갈 수밖에 없는지 아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그 이후의 세대에게는 ‘너’와 ‘나’가 아니라 작은 것 하나라도 ‘우리’가 같이 하자, 같이 바꾸자는 마음을 갖게 하는 영화가 됐으면 해요. 힘든 일을 하는 주변 사람들을 애정의 눈길로 볼 수 있게 하는 영화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이숙희씨)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감독 이혁래·김정영) ⓒ영화사 진진 제공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감독 이혁래·김정영) ⓒ영화사 진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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