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 개막
나탈리야 곤차로바·올가 로자노바·류보프 포포바 등
주류 남성 작가들과 나란히
예술적·지적 혁명 이끈 여성 예술가들 재조명

올가 로자노바, 비구상적 구성, 1916, 90×74, 캔버스에 유채 ⓒEkaterinburg Museum of Fine Arts
올가 로자노바, 비구상적 구성, 1916, 90×74, 캔버스에 유채 ⓒEkaterinburg Museum of Fine Arts

나탈리야 곤차로바, 올가 로자노바, 나데즈다 우달초바, 바르바라 스테파노바, 류보프 포포바, 알렉산드라 엑스테르.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아마조네스’라 불리는 여섯 예술가다.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기에 당대 주류 남성 작가들과 나란히 ‘미술 혁명’을 이끈 여성들이다.

이들의 작품이 서울에 왔다.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린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이다. 러시아 미술가 49명의 작품 75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의 눈은 칸딘스키와 말레비치라는 현대 추상미술을 이끈 두 러시아 거장에 쏠렸다. 알고 보면 더 흥미로운 작품이 많다.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혁신적인 예술 흐름을 주도해 서구의 현대 디자인과 건축에 큰 영향을 미친 알렉산드르 로드첸코, 엘 리시츠키 등의 작품이 시선을 붙든다.

특히 새로운 양식의 회화예술을 창조하고, 독창적인 미술 이론을 전개하며 당대의 예술적·지적 풍토를 선도했던 여성 작가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세계 유명 미술관과 미술사가들이 잊혀진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을 발굴해 재평가하는 요즘, 눈여겨볼 만한 전시다.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 포스터.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 포스터.

혁명기 러시아 미술사에서 주목할 부분은 여성들의 활발한 참여다. 남녀평등을 포함해 사회적 평등,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혁명 이념의 영향이 크다. 러시아 사회에서는 이미 1860년대부터 여성 문제가 논의됐다. 1891년부터는 여성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여성 미술학도는 점점 늘어 20세기 초에는 30여 명이 혁신적인 운동과 전시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성도 사회주의 혁명을 주도하는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 전사로서 미술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시대정신이 엿보인다.

여성이 미술사에서 주체적인 예술가로서 지위를 인정받은 역사는 길지 않다. 여성에게는 예술 창작이나 작품을 감상, 비평할 지적 능력이 없다는 오랜 편견 탓이다. 1971년 미국의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은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답은 가부장적 사회 제도와 교육 체제가 여성을 소외시켰기 때문이다. 19세기 말까지 극소수를 빼면 여성은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없었다. 여성이 예술로 이름을 알리려면 남성 미술가들과 밀접한 사적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어려웠다. 창작, 가사, 육아를 홀로 도맡아야 하는 고충도 컸다.

이번 전시를 맡은 이훈석 큐레이터(러시아미술사 박사)는 11일 한국일보 칼럼에서 “(러시아 아방가르드 시기 여성 예술가) 대부분은 당시 활발히 활동하던 남성 예술가 및 이론가들의 아내나 연인이었으나 서로 간 관계는 절대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주체적 개인 간의 결합이었다”라며 “서구 미술사에서 남편이나 아버지, 형제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인정받지도 못했던 여성들이 많았음을 상기한다면 러시아 혁명기 여성 미술가들과 배우자들 간의 대등한 관계는 매우 이례적”이라고 설명했다.

나탈리야 곤차로바, 추수꾼들, 1911, 106×130.5, 캔버스에 유채 ⓒEkaterinburg Museum of Fine Arts
나탈리야 곤차로바, 추수꾼들, 1911, 106×130.5, 캔버스에 유채 ⓒEkaterinburg Museum of Fine Arts

나탈리야 곤차로바는 귀족 출신이다. 엘리트 중등 교육과정인 여성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모스크바 회화 조각 건축학교에 조소 전공으로 입학했다. 대학에서 만나 결혼한 미하일 라리오노프의 영향으로 회화를 전공하기 시작했다. 1909년 대학을 중퇴하고 1910년 라리오노프, 로베르트 팔크, 표트르 콘찰로프스키, 일리야 마시코프 등과 함께 급진적 독립 미술가들의 전시인 ‘다이아몬드 잭’, ‘당나귀 꼬리’를 조직했다.

곤차로바는 남편 라리오노프와 함께 러시아 추상미술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들은 ‘신원시주의’와 ‘광선주의’를 주창해 새로운 양식의 회화예술을 탄생시켰다. 신원시주의란 근대 물질문명에 오염된 미술이 잃어버린 근원적인 생명력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었다. 19세기 말 폴 고갱이 원시의 생명력을 찾아 타히티 섬으로 떠났듯이, 러시아 신원시주의자들은 러시아 농촌에서 본래의 순수한 생명력을 찾고자 했다. 풀과 나무를 베거나 물을 긷거나 길쌈을 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그렸다. 또 러시아의 민속 판화로 다소 투박하나 정감 있는 ‘루복’이나, 밝고 화려한 색채가 눈에 띄는 동방정교의 성상화 ‘이콘’의 표현 방식을 통해 러시아만의 새로운 미술을 탄생시키고자 했다.

곤차로바의 ‘추수꾼들’은 민속 목판화처럼 윤곽선을 강조하고 거칠면서도 단순한, 평면성이 부각되는 방식으로 그려졌다. 이러한 표현방식은 한층 더 발전해 ‘다람쥐들’과 ‘난초꽃’처럼 패턴적 장식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올가 로자노바, (화가의 자매) 안나 로자노바의 초상, 1912, 114×141, 캔버스에 유채 ⓒEkaterinburg Museum of Fine Arts
올가 로자노바, (화가의 자매) 안나 로자노바의 초상, 1912, 114×141, 캔버스에 유채 ⓒEkaterinburg Museum of Fine Arts

올가 로자노바는 모스크바 미술학교를 거쳐 1910년대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의 협회인 ‘청년연합’에 참여했다. 시인 알렉세이 크루쵸니흐와 연인관계로 발전하며 미래주의적 시와 기하학적 색면 추상 판화를 합친 작품집을 만들었다. 1916년 말레비치의 ‘수프레무스’에 합류해 입체주의와 미래주의를 거쳐 절대주의 순수 추상을 탐구했다. 지금의 문화부에 해당하는 인민계몽위원회 미술분과 위원으로 활발히 활동하기도 했다.

로자노바의 ‘비구상적 구성 연작’은 원형, 사각형 등 순수 기하학적 형태만을 배치해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말레비치처럼 로자노바도 작품을 통해 인간의 정신적 창조력이 신의 창조력과 동등한 절대적 힘을 갖는 새로운 세계를 꿈꿨다. 32세에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지만, ‘녹색 선’을 포함한 그의 추상회화 작품들은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에 버금가는 20세기 러시아 추상회화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올가 로자노바, 비구상적 구성, 1916, 90×74, 캔버스에 유채 ⓒEkaterinburg Museum of Fine Arts
올가 로자노바, 비구상적 구성, 1916, 90×74, 캔버스에 유채 ⓒEkaterinburg Museum of Fine Arts
나데즈다 우달초바, 부엌, 1915, 161x165, 캔버스에 유채 ⓒEkaterinburg Museum of Fine Arts
나데즈다 우달초바, 부엌, 1915, 161x165, 캔버스에 유채 ⓒEkaterinburg Museum of Fine Arts

나데즈다 우달초바는 20대에 서유럽에서 미술을 공부하면서 세잔, 반 고흐, 마티스, 피카소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귀국해 ‘다이아몬드 잭’ 전시, 미래주의 전시 등 급진적 미술 운동에 동참했다. 혁명 이후에는 건축, 실용품, 무대, 의상 등 생산적 미술을 추구하는 구축주의자들에 반발해 순수 회화에 집중했다. 남편 알렉산드르 드레빈과 함께 스보마스-브후테마스-브후테인으로 이어지는 혁명 이후의 새로운 미술교육 제도 속에서 새로운 미술의 보급에 앞장섰다.

이번 전시에선 엄혹한 시대적 상황이 어떻게 예술가들의 화풍을 변화하는지 비교해 볼 수 있다. 우달초바의 1915년작 ‘부엌’은 다양한 시점과 형태들의 배치를 통해 역동성을 강조한 작품으로, 전형적인 입체미래주의 회화다. 1920년대 말 스탈린 시대에 접어들면서 아방가르드 미술은 ‘퇴폐미술’로 찍혀 탄압당했다. 우달초바와 드레빈 부부도 억압을 피해 구상회화로 돌아갔다. 자연을 그린 그 시기의 작품들을 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 이후 우달초바는 반혁명행위 혐의로 체포된 남편의 그림이 압류되는 것을 피하려고 정부에 자신의 작품을 대신 내놓기도 했다. 남편이 사형당한 이후에는 그 자신도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이들의 작품은 스탈린 사후인 1958년 이후에야 소련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바바르 스테파노바의 무대 의상 디자인. ⓒWikipedia
바바르 스테파노바의 무대 의상 디자인. ⓒWikipedia
류보프 포포바의 무대 의상 디자인. ⓒWikipedia
류보프 포포바의 무대 의상 디자인. ⓒWikipedia

혁명 이후 고무된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은 일상에서 쓸 수 있는 실용품 제작에 몰두했다. 이들은 유물론적 사고에 입각해, 예술이 새로운 시대의 생활과 물질문화의 기반이 돼야 한다고 봤다. 건축, 가구, 의상, 무대, 광고 등 ‘생산적 예술’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직접 창조하고자 했다. 바로 ‘구축주의’, 현대 디자인과 건축에 큰 영향을 미친 예술 사조다.

여기서도 여성들의 활약이 빛났다. 바르바라 스테파노바는 1921년 ‘구성 대 구축 논쟁’을 기록, 정리해 알렉산드르 로드첸코와 함께 구축주의 이론 확립에 큰 역할을 했다. 류보프 포포바도 빼놓을 수 없다. 스테파노바와 포포바는 순수미술을 산업디자인의 틀 안에서 재해석한 여성 예술가들로 꼽힌다. 이들은 19290년대 ‘대량 생산 가능, 계급을 떠나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을 목표로 실용성과 기능성의 조화를 꾀하면서도 혁신적인 직물 패턴과 의상 디자인을 선보였다. 알렉산드라 엑스테르는 미래주의, 추상주의 회화 등 작업에 나서 러시아 아방가르드 운동에 적극 동참했고, 1920년대에는 구축주의적 무대 미술 디자인을 선보여 주목받았다.

이들은 당대 서유럽과 러시아의 예술적 가교이기도 했다. 이들이 선보인 디자인이 서유럽에 소개되면서 현대 무대미술 발전의 초석이 됐고, 20세기 초 디자인 산업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엑스테르는 1925년 페르낭 레제의 초청으로 파리의 현대미술 아카데미에서 강단에 서기도 했다.

화려하게 꽃피웠던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스탈린 체제에서 ‘퇴폐 미술’로 탄압당하면서 서양미술사의 그늘로 밀려났다. 1991년 냉전체제 종식 이후에야 재조명돼, 구미 중심 미술사의 지평을 넓히는 예술 사조로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황규진 큐레이터는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여성들이 남성들과 ‘예술적 동지’로서 나란히 서서 추상회화, 무대예술, 실용품 디자인까지 전방위에서 활약하고, 한 명의 예술가로 자리매김한 중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또 “혁명에 고무된 젊은 작가들은 예술을 통해 낡은 것들을 전복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압수당해 불태워지는 수모도 겪었지만, 오늘날 러시아 국립 문화재로 등록돼 재평가받는 작품들을 이번 전시에 모았다. 긴 세월 끝에 승리한 것은 권력이 아닌 예술이었다”라고 말했다. 전시는 4월 17일까지.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전시장 현장. ⓒ이세아 기자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전’이 열리는 서울 종로구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전시장 현장. ⓒ이세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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