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경운동 편지 ④

 

'소년심판'의 주연 김혜수 

 

TV드라마를 좋아합니다. 휴머니즘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드러나는 드라마에 꽂힙니다. 신데렐라 드라마는 사절입니다. ‘대장금’ ‘태양의 후예’ ‘스토브 리그’ 등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습니다. ‘대장금’은 수랏간 무수리 장금(이영애)이 어의녀가 되기까지의 꿋꿋한 삶은 물론 그를 응원하는 상궁과 후궁 등 여성의 연대가 좋았지요.

‘태양의 후예’엔 여성들(송혜교, 김지원)끼리의 이른바 ‘여여 갈등’이 없었습니다. 한국 드라마의 새 장을 열었다 싶었습니다. ‘스토브 리그’는 야구단 운영팀장을 맡은 여주인공의 씩씩함과 함께 직장의 상하관계인 남녀(남궁민, 박은빈)가 러브라인 없이 각자 제 할 일을 다 하는 게 정말 상큼했습니다.

요즘 화제작인 넷플렉스오리지널 드라마 ‘소년심판’(연출 홍종찬, 극본 김민석)을 봤습니다. ‘소년심판’은 ‘넷플릭스 주간 톱10′(시청시간 기준 집계)에서 3월 첫 주(2월 28일~3월 6일) 글로벌 1위(비영어 시리즈 부문)에 올랐습니다. 판사가 수사관처럼 조사하고 다닌다는 설정이나 직장상사가 연루된 사건을 끝까지 파헤치고 상사 또한 그런 부하직원의 태도를 용납한다는 내용은 ‘글쎄‘ 싶었지만 ’드라마니까‘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소년심판’의 경우 총10편에 에피소드는 5개입니다. ‘초등생 유괴 살인사건’ ‘청소년보호센터의 명암’ ‘상류층 아이들의 시험지 유출 사건’ ‘미성년자 무면허 교통사고’ ‘청소년들의 집단성폭행 사건’ 등입니다. 제목 그대로 청소년들 이야기인데 욕설과 비속어는 물론 자극적인 장면도 꽤 많다 보니 ‘18세 이상’ 등급입니다.

고개를 돌리고 싶은 씬도 여럿 있는데 주위 변호사들 얘기에 따르면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하다”고 합니다. 만 14세 미만 촉법소년이라고 처벌 받지 않은 아이들이 법정을 나서며 히죽히죽 웃는 장면은 드라마라도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성폭행 사건의 경우 “성폭행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외침은 뇌리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구요.

폭행장면이나 나체를 촬영한 영상을 판매하고, 그 영상을 빌미로 조건만남(성매매)을 강요하는 등 피해자의 삶을 생지옥으로 만든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다뤄야 할 사건이 워낙 많다 보니 ‘소년재판은 스피드‘라고 강조하면서 속전속결로 처리한다는군요. 말만 들어도 메스꺼워 금방이라도 토할 것같습니다.

우리 사회 한 구석에서 벌어지는 끔찍하고 살벌한 일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이 드라마를 시청하게 만드는 힘은 탄탄한 대사, 꼼꼼한 구성, 김혜수를 비롯한 배우들의 열연입니다. 김혜수는 나이(52)에 아랑곳 없이 여전히 아름답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소년재판 담당 판사 심은석의 역을 잘 소화합니다.

'소년심판' 포스터

 

김혜수는 극 중에서 시종일관 같은 태도를 유지합니다. ‘ 소년범을 혐오한다’는 그에게 동료판사(김무열)는 묻습니다. “왜 그러시나요?” 답은 간단합니다. “범죄자니까. 감히 그 나이에.” 그리곤 강조합니다. “가르쳐야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걸. 부모와 학교가 못 가르치면 우리라도 가르쳐야죠. 그래야 더 큰 죄를 못 짓죠.”

그는 또 늘 피해자 편에서 생각하려 애씁니다. 피해자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치유해주기 위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싶어서 그는 파란색 골무를 낀 채 사건 기록을 읽고 또 읽고, 현장의 CCTV를 뒤집니다. “피해자인데 왜 손가락질 받아야 하느냐”는 소녀에겐 “네 잘못 아니야. 고개 들고 당당하게 다녀”라고 하지요.

무엇보다 타협하지 않습니다. 부장판사의 아들이 연루된 걸 알면서도 파고 들고, 새로운 부장판사의 견제와 무시를 견디고 할 말을 합니다. 윗사람에게 대들 때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도 않습니다. 남자 후배판사를 대할 때도 같습니다. 매사 경계가 분명합니다. 멜로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래서 좋았습니다. 힘들지만 당당하게 주체적 삶을 살아내는 여성을 보는 일은 드라마라도 뿌듯합니다. 드라마 초기에 마냥 당찬 듯하던 여성이 어느 순간부터 남자의 보호와 보살핌에 빠져 ‘품 안의 그녀’가 되는 걸 보면 한숨이 나는 것과 대조적이지요. ‘소년심판’의 심 판사에겐 그런 신데렐라적 요소가 1도 없습니다.

개인적 아픔을 홀로 견디며 일로 승부하고, 신념을 실천하는 심은석 판사를 재현해내는 김혜수는 쉰살 넘어 원톱을 맡는 여배우입니다. 쉼표의 힘을 전달하는, 툭툭 끊는 말투마저 매력적입니다. 여배우 나이 마흔살만 돼도 설 자리가 없던 시절에 비하면 세상 참 좋아졌습니다. 이 좋은 세상이 저절로 온 건 아니겠지요. 끊임없이 스스로를 갈고 닦아 5060에 주연을 꿰차는 멋진 여배우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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