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우리말 쓰기 ②〕 하절기· 제연경계벽· 노견

지하철 실내 좌석 위 창에 붙여진 안내 문구.   ⓒⓒ여성신문
지하철 실내 좌석 위 창에 붙여진 안내 문구. ⓒⓒ여성신문

<이곳의 일곱 개 좌석은 다른 곳보다 바람의 영향이 적고 온도가 2℃ 높은 자리입니다.(하절기)>

지하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구다. 에어컨 바람의 세기가 약해서 다른 좌석들보다 온도가 다소 높다는 설명이다. 눈길을 끄는 건 괄호 속에 든 ‘하절기’다. 여름철 또는 구체적으로 6~8월이라고 쓰면 될 것을 굳이 하절기라고 써놓는다.

지하철 뿐이랴. 관공서나 공공기관에선 으레 하절기라고 한다. 하절기 방역 소독사업. 하절기 폭염대응 지원, 하절기 친환경 집중방제, 하절기 절전 매뉴얼. 하절기 주말 연장 운영. 마찬가지로 겨울철은 동절기라고 적는다.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담당자들에겐 여름철 겨울철보다 하절기 동절기가 더 근사해 보이는 모양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있는데도 굳이 어려운 한자어를 쓰는 일은 이밖에도 수두룩하다. 지하철역에서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가다 보면 마주치는 ‘제연경계벽’도 그 중 하나다. 계단 아래쪽 위 천장에서 웬만큼 내려온 플라스틱 막 앞에 떡하니 붙어 있다. 연기를 통제하는 경계벽, 다시 말해 불이 나면 특성 상 위로 올라가는 연기가 앞으로 퍼지지 못하도록 막는 벽 내지 막이라는 얘기다.

위쪽에만 있으니 벽이라기보다는 막에 가깝지만 대부분 경계벽이라고 써 있다. 어느 지하철역에나 다 있지만 과연 제연경계벽의 뜻과 용도를 아는 이가 몇이나 될까. 그나마 ‘경계’라는 단어가 들어 있으니 뭔가 구분 짓는 건가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경계벽을 떼어내고 ‘제연’의 뜻만 말해 보라고 하면 제대로 맞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지 알기 어렵다.

지하철역 구내에 설치된 연기방지막. '제연경계벽'이라고 돼 있다. ⓒⓒ여성신문
지하철역 구내에 설치된 연기방지막. '제연경계벽'이라고 돼 있다. ⓒⓒ여성신문

 

 

‘연기 방지벽’ 내지 ‘연기 방지막’이라는 쉬운 말을 놔두고 ‘제연경계벽’이라는 어려운 용어를 쓰는 이유도 하절기 동절기라고 부르는 것과 크게 다를 것같지 않다. 아니면 그쪽 분야에선 늘 사용하던 용어여서 별 생각 없이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일 수도 있다. 일반인들이야 뜻을 알든 말든.

‘노견’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이 모르거나 ‘나이든 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교통 용어로 쓰이는 노견은 ‘갓길’이라는 뜻이다. 사전엔 ‘길어깨’라고도 돼 있지만 갓길이라는 우리말로 다듬어진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도 노견이 더 그럴 듯한지 칼럼이나 에세이의 간판을 ‘노견 일기’라고 달아 놓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노견이 갓길인지 모르는 사람은 ‘노견 일기’를 ‘늙은 개의 일기’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한국어는 70%의 한자어와 30%의 고유어로 돼 있다. 한자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정부의 한글 전용 정책으로 70%의 한자어가 소리나 암호로 변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슨 말인지 읽을 수는 있으나 뜻을 모르니 언어가 아니라 단순한 소리 내지 암호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결혼식 성혼맹세 문구에 등장하는 ‘고락을 같이하고’의 ‘고락’(괴로움과 즐거움)의 뜻도 모르는 이들이 상당수라니 ‘한자어는 암호’라는 주장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뜻글자인 한자와 소리글자인 고유어를 함께 사용하는 것은 한국의 큰 축복’이라는 이들도 많다. 잘만 사용하면 두 가지 문자의 다른 특징이 서로 보완,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표현력을 풍성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언어생활이 지능을 향상시킨다는 것이다.

문제는 뜻글자인 한자를 가르치지도 않는데 지하철같은 공공장소나 언론에서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쉬운 말로 쓸 수 있는 말조차 관습적으로 쓰면서 “이런 것도 모르다니” 하는 건 곤란하다.

언어정책이 바뀌면 그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이나 후유증에 대한 고려와 대책도 있어야 한다. “학생들이 교과서를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한다”거나 “나이든 세대의 문해력이 너무 떨어진다”고 할 게 아니라 왜 교과서의 문구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한자어를 이해하는 세대의 기준으로 교과서를 만든 건 아닌지, 나이든 세대에 대한 고려나 배려 없이 영어 등 외국어를 지나치게 남발하는 건 아닌지 살펴야 한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따르면 문해력은 ‘문장을 이해하고, 평가하며, 사용함으로써 사회생활에 참여하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며, 자신의 지식과 잠재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문해력이 좋아야 사회활동도 제대로 하고, 스스로를 향상 발전시키고, 다른사람과의 소통도 가능하다는 말인 셈이다.

거꾸로 보면 문해력이 떨어지면 사회활동은 물론 대화와 소통도 어렵다는 말이 된다. 꼭 필요한 경우는 어쩔 수 없다 해도 ‘하절기, 동절기, 제연경계벽, 노견’처럼 쉬운 말로 바꿀 수 있는 단어들은 바꿔 쓰자. 한자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노력과 보다 많은 독서가 필요하겠지만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괜스레 써놓은 한자어 때문에 ‘읽을 순 있지만 이해가 안 되는’ 신종 문맹자를 만드는 건 지양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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