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괴물’과 나쁜 여자들의 서사, 연극 ‘웰킨’
‘여자 괴물’과 나쁜 여자들의 서사, 연극 ‘웰킨’
  • 이세아 기자
  • 승인 2022.06.12 20:11
  • 수정 2022-06-13 1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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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까지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영국 극작가 루시 커크우드 신작
‘두산인문극장2022: 공정’ 한국 초연
7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열리는 연극 ‘웰킨(The Welkin)’. ⓒ두산아트센터
7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열리는 연극 ‘웰킨(The Welkin)’. ⓒ두산아트센터

1759년 3월 영국. 21살 하녀 샐리 포피가 여아 살해 혐의로 체포됐다. “동네의 문제 덩어리”였던 이 여자, 교수형을 선고받자 임신했다며 감형해 달란다. 여성 12명이 배심원으로 모여 갑론을박을 벌인다. 샐리는 정말 임신했나? 집안일만 하던 여자들이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

연극 ‘웰킨’(The Welkin)은 여성 극본·연출에 여성 배우들이 이끌어가는 작품이다. 남성이 출연하되 입을 거의 열지 않거나 보조적인 역할에 머문다. 이런 작품에 으레 기대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여성 연대’, ‘억압에 저항하는 선하고 똑똑한 여성들의 서사’.... 그 기대를 보란 듯이 배반한다. 뚜껑을 열어보니 ‘여자 괴물’과 ‘나쁜 여자들’의 서사다. 수상하고, 난감하고, 마뜩잖고, 복잡하고, 외면하고 싶은 여자들이 우르르 나온다. 불편하고 흥미진진하다.

“늘 참는 여자. 늘 똑같은 여자. X까.” “나보다 많이 가진 년은 다 죽여버릴 거야.” 샐리가 섬뜩한 말을 내뱉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발작적으로 웃을 때마다 장내엔 긴장감이 감돈다. 동정도 연민도 불필요한 악녀로 보인다. 알고 보면 어릴 적 친모에게 버려져 양아버지·고용주 등 동네 남자들에게 성 학대를 당한 피해자다. 그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악마일까? 가부장제의 피해자일까? 어쨌거나 법원 밖 성난 군중은 샐리가 교수대에 매달리기만을 바란다.

‘불온한 여성을 단죄해야 한다’는 믿음은 여성 배심원들 사이에도 존재한다. “대신 원망할 여자가 있으면 아무도 신을 원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적 원한이나 편견 때문에 비합리적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여성’이라는 연대감은 희미한데, ‘여성의 의무’는 매 순간 이들을 조여온다. 순무를 뽑으러 가야 한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여자, 아이들, 집안일 걱정에 잠긴 여자, 갱년기로 몸에 열이 올라 아파하는 여자.... “우리는 정의라는 거 찾기엔 정말 형편없는 무리”라는 탄식이 나온다.

7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열리는 연극 ‘웰킨(The Welkin)’.  ⓒ두산아트센터
7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열리는 연극 ‘웰킨(The Welkin)’. ⓒ두산아트센터

극의 배경인 18세기 중반 영국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결코 높지 않았다. 토지의 대부분이 소수 지배 엘리트에게 넘어가고, 무산자의 비율이 증가하던 시기다. 영아 사망률은 높고, 여성 노동인구 1/3이 하녀였고 나머지는 농장일·방적·뜨개질·자수·유모 등 가내 활동에 종사하던 시대다. 아내폭력이 빈번했고 여성의 간통은 처벌 대상이었다. 여성에겐 참정권을 포함한 법적·사회적 권리가 보장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이 가족의 재정 자원을 관리하고, 빵과 곡물 가격 폭등을 막기 위해 시위를 벌이기도 하는 등 제한적으로 권리를 행사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극중 모든 여성이 ‘마녀사냥’에 찬성하진 않는다. “하늘 아래 한 사람 한 사람은 존엄”하며, “쥐뿔도 모르는 판사들”과 달리 “우리에겐 선택권이 있다”고 강력히 호소하는 엘리자베스가 대표적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 숨겨온 비밀이 폭로되며 이 여성의 발언권과 신뢰를 끌어내리는 장면은 무참하기까지 하다.

‘웰킨’은 이렇게 규범 바깥의 여자들을 불러낸다. 이들을 향한 손가락질에 동참하기를 권하지도, 동조나 연대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자기 생존이나 욕망을 우선시했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고립된 ‘나쁜 여자’들을 불러내고 그들이 입을 열 수 있도록 할 뿐이다.

연극 ‘웰킨’ 포스터. ⓒ두산아트센터
연극 ‘웰킨’ 포스터. ⓒ두산아트센터

‘차이메리카’로 2015년 로렌스 올리비에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영국 극작가 루시 커크우드의 신작이다. 2020년 영국 국립극장 초연 당시 젊은 관객층을 중심으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연극”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두산인문극장2022: 공정’을 통해 처음으로 정식 무대에 오른다. 고윤희, 김별, 민대식, 라소영, 송인성, 이정미, 하지은 등 개성 강한 배우 15명이 출연해 180분간 밀도 있는 연기를 펼친다. 

제목 ‘웰킨’(welkin)은 창공, 하늘을 뜻한다. 진해정 연출은 “존엄에 대한 연극”이라고 했다. “땅이라는 현실 속에서 스스로의 존엄을 잊거나 잃었던 인물들이 끝내 그것을 회복하는 이야기다. ‘회복’이 당시에는 아주 미약하고 무의미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 순간들이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끌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작품의 여성 인물들은 집안일이라는 현실에 갇혀 위를 향한 시선을 잃어버린 상태로 출발한다”며 “작품에서 자주 다뤄지는 단어가 ‘하늘’과 ‘땅’이다. 작가는 누가 하늘을 볼 수 있고, 어떤 이들이 하늘을 볼 수 없는지, 땅의 현실은 누구에게 풍족함과 잔인함으로 다가가는지를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있다. 그러한 지점이 ‘공정’이라는 키워드와 깊이 닿아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Space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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