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6일 오늘은 제71주년 여군의 날이다. 그러나 외형적 성장에 비해 여군 인권의 현주소는 참담하다.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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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학교 생도 때 일이다. 나는 졸업하는 그날까지 생리불순과 투쟁했다. 갑작스럽게 변한 생활습관, 여고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육체적 피로도, 아무도 알려준 적 없는 낯선 군대 생활과 적응과정에서 감내해야 하는 숱한 눈치와 얼차려, 훈련, 사관학교의 생도문화까지. 월경 주기가 엉키다 못해 어느 달은 멈췄다 어느 달은 한 달 내내 하혈을 하고, 여기에 빈혈까지 동반되기 시작하자 진료를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군 병원을 이용해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군대는 병원에 가고 싶다고 바로 병원에 갈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일단 부대 의무시설을 통해 예약을 잡고, 대기 순번을 기다리고, 나와 함께 3차 병원으로 ‘원정 버스’를 채울 다른 장병들이 모이길 기다려야 한다. 생도는 매일 학과 수업이 있기 때문에 수업을 빠지는 것도 어느 정도 고려해야 한다. 이 모든 기운을 모아서 3차 병원을 가기까지는 거의 한달 정도 걸린다. 아무튼, 어렵사리 병원에 가는 것엔 성공했다. 그런데 도착한 병원 원무과에서 들은 대답은 산부인과 군의관의 전역으로 인해 폐과됐으니 진료가 어렵다는 허망한 설명이었다.

2013년 강원도 최전방 부대에서 임신 중이었던 여군 중위가 과로로 인한 임신성 고혈압으로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 적 있다. 이 사고로 인해 군은 (육군의 경우) 임신한 여군의 근무처를 산부인과에 30분 이내 도착할 수 있는 곳으로 조정하고, 전방에 근무하는 기혼 간부들을 위해 보육 대상자가 15명이 넘으면 군 탁아시설을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전까지는 누더기로 내려오던 지침이 ‘모성보호정책’의 이름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육아휴직뿐 아니라 임신이 확인되면 출산 후 6개월까지 당직 근무를 면제해주는 제도부터, 난임 휴가의 사용, 산부인과 진료에 대한 비용지원, 육아를 위한 탄력근무제도 등이 본격적으로 들어와 시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부인과에 3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근무지는 나와 국방부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군대라는 곳은 산골 오지나 도심과는 멀리 떨어진 지역에 위치하는데, 나의 근무 의지와 상관없이 산부인과는 줄줄이 폐업 중이다. 지역에 산부인과가 없어서 사망하거나 산모가 위험한 순간에 처하는 것은 전방에 근무하고 있는 여군만 겪는 일이 아니게 됐다. 자연스레 생애주기상 임신을 고려하거나 임신한 기혼 여군들은 인프라가 갖춰진 대도시로 이동하게 된다. 굳이 산모가 아니라도, 부인과 진료를 받는 것조차 여군들에게는 녹록지 않다. 이런 상황이 쌓이다 보면 전체적으로 여군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퍼진다. ‘어차피 여군들은 업무 강도가 낮은 후방 또는 편하고 좋은 지역으로 빠져 근무하다 결혼하고 육아할 건데, 뭣 하러 우리 부대에 받아서 근무시키냐’는 것이다. 업무 강도가 높고 인정받을 수 있는 전방 지역에 여군의 복무가 어려워지는 환경이 반강제적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어렵사리 자녀를 낳아도 이번에는 ‘누가 아이를 기를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군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의 대기 순번은 지역을 불문하고 대부분 백 단위가 넘어간 지 오래다. 요즘은 남군들의 육아휴직 사용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돌봄 노동은 여성이 우선한 문제로 여겨진다. 남군의 육아휴직과 탄력근무제 사용은 여군이 불가할 시 발동되는 플랜 B다. 여전히 많은 일선 부대 지휘관들은 육아로 인해 탄력근무제나 당직 면제를 사용하고자 하는 남·여군 모두를 ‘부대보다 자기 자식한테나 충성하는’ 이기적인 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결국 고민에 지쳐 한쪽이 전역을 결심하게 되고, 대부분 이 한쪽은 여군이 담당하게 된다.

여성이 필요한 산부인과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 가족계획을 자신의 결정권을 바탕으로 오롯이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자녀를 안전하게 낳을 수 있는 권리, 자녀를 안전하게 기를 수 있는 권리는 각각 개별적인 권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재생산(Reproductive Rights)에 관한 권리에 모두 포섭된다. 94년 카이로와 95년 북경선언을 토대로 강화된 재생산권은 국제규약과 국제인권조약에 광범위하게 인정하고 있는 권리인 것이다. 재생산과 성건강을 포함한 신체·정신적 건강을 획득할 수 있는 권리부터 결혼에서의 평등권, 가족계획에 대한 교육과 정보에 대한 접근권, 프라이버시, 폭력으로부터의 여성안전, 여성의 선택에 의한 안전한 가족계획과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한 권리 등을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재생산권과 관련한 논의가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2010년대 중반 낙태죄 폐지와 관련한 사회 운동이 커지면서부터이다. 2019년 헌법재판소의 불합치 결정은,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임신중절이 태아의 생명권에 대한 문제가 아닌, 임신 여성의 재생산권과 자기결정권에 대한 문제임을 사회적으로 각인시켜 준 사례가 됐다.

재생산권 논의에 항상 붙어 나오는 임신중절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문제로 인해 우리는 이것이 생명권과 관련된 논의 혹은 여성에게만 한정된 권리라고만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재생산권은 넓은 의미에서 안전할 권리에 더욱 가까운 개념이다. 안전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폭력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복무할 수 있어야 하고, 안전하게 출산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안전하게 자녀를 양육할 수 있어야 하는 권리. 이런 것은 개별 군인의 노력이나 혹은 각 사안마다 땜질식 정책, 규정으로 해결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 재생산권이라는 것은 사람의 생애주기와 생활 전반에 연속하여 걸쳐있는 권리다. 따라서 남·여군 할 것 없이 생애주기의 맥락에서 고려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기혼 여군을 받자마자 무섭게 후방 지역으로 내쫓기듯 보내거나 탄력근무제에 대한 승인을 받으러 갔다 유별나고 이기적인 군인으로 취급하는 문화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필요한 시기에 적절한 진료를 받지 못해 상황이 악화되는 일도 여전할 것이다.

지난 6월 24일, 미국에서 임신중절에 대한 권리를 처음 인정하였던 ‘로 대 웨이드’ 판례가 50년 만에 뒤집혔고, 한편 우리나라는 3년 전 낙태죄 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후 여전히 입법 공백 상태로 부유해 있다. 재생산권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가운데, 우리 군대에서도 재생산권의 논의가 군대에서도 활발히 진행돼야 할 타이밍이다. 여군에게도, 아이에게도, 부부군인에게도 건강하고 안전한 군대는 당연히 모두에게 안전한 군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방혜린 전 군인권센터 활동가·예비역 대위
방혜린 전 군인권센터 활동가·예비역 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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