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잔혹사'에서 더 나아갔나?

아시아영화를 바라보는 그들의 '오리엔탈리즘'

<올드 보이>가 칸느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으면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국제적인 명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올해 초 베를린영화제에선 <사마리아>(김기덕 감독상 수상), 2002년 베니스에선 <오아시스>(이창독 감독상과 문소리 신인배우상 수상), 같은 해 임권택감독은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칸느에서 <취화선>으로 감독상 수상의 명예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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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자연스럽게 교집합이 생긴다. <사마리아>는 김기덕표 영화답게 매춘부 여성론을 어린 여성에게로 확대, 적용하는 남성방황 구도행이고, <오아시스>는 장애여성에 대한 강간과 사랑의 경계를 오가는 문제적 설정이 한국 내에서 논쟁을 일으킨 바 있다. <취화선>은 가난한 화가의 그림 도닦기 여정에서 일회용으로 스쳐지나가는 여성이미지들의 도구화가 걸린다. 여기에 꾸준히 국제영화제에 초청되는 홍상수 영화들이 그려내는 영화세상, 여성들이 농락당하는 이야기를 (남성)소시민의 비열한 일상 방황담으로 치환하는 영화들까지 겹쳐서 돌리면 아득해진다.

▲올드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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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화선

2000년대 이전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한국영화들이 주로 여우주연상을 연달아 받던 시절의 풍경들이 떠오른다. 최초로 칸느에 초정된 <물레야 물레야>는 '이조여인 잔혹사'란 부제를 달고 있다. 이 부제는 징후적인데, 이후 영화제에 나간 영화들은 하나같이 여성수난사 서사로 묶일 만한 <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아다다> 등이다. 한복 입은 여자들, 아들을 낳아야하는 가부장적 역사적 사명을 위해 그녀들의 인생이 농락당하는 이야기는 처참하다. 남자 믿고 살라는 주술에 걸린 여자들이 그 남자들에게 치여 인생 망가져 나가는 이야기는 당연히 처절한 연기로 구축되는 캐릭터를 양산해내고, 그 역을 맡은 여배우들은 최우수 여배우상을 받는다. 격한 온몸 연기를 해낼 수밖에 없기에 상 받을 설득력이 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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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에서 전통의상에 갇힌 여성의 고통담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그녀들은 도시 속 남자 세상에서 남주인공들의 고뇌와 방황, 구도행 속에서 다시 지워지고 억압되고 무너져 나간다. 몸이 뒤틀리고, 몸을 대주고, 남자를 위로한다. 설령 드라마 설정상 음모로 인해 부조리하고 부당한 상황에 놓였다 해도, 남주인공들은 그걸 깨달은 순간부터 복수든 뭐든 반작용 행동에 들어선다. 그러나 여자들은 그런 남주인공을 보조하고 방해할 뿐이다. 험한 인생이란 전쟁터, 하지만 대가를 치르면서 자기 몫을 쟁취하는 영화세상. 그 판에서 남자들은 게임을 벌이고 선수로 뛰지만, 여자들은 장애물과 위안물 사이를 오가는 성취없는 인물, 캐릭터화에 실패한 소도구적 인물로, 반여성적인 분열적 이미지로 명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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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그렇다면 우리에겐 성정치학적 혐의를 자아내는 영화들이 국제영화제에서 인정받는 모순은 어디서 파생하는 것일까. 아시아영화를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과 무관하지 않은 이국취향을 부인하기 힘들다. <올드 보이>를 격찬한 타란티노의 <킬빌>이 보여주는 이소령에 대한 존경과 기모노 입은 여전사의 고혹적 자태는 '나비부인'의 오리엔탈리즘과 분리되지 않는다. 물론 <올드 보이>는 상대적으로 잘 만든 장르영화다. 단 성정치학적 관점을 배제한다면 말이다. 게다가 여성이 남성욕망 판타지속에 갇혀 있는 타자가 아니라 주체로 공존하는 영화세상은 영화제에선 고려되지 않는다. 마이클 무어식 정치학은 통하고 존경받지만, 성정치학은 여전히 그녀들만의 일이라고 괄호 속에 넣는 관행이 국제영화제에서 실현된다. 이국취향을 즐기면서 남성판타지 과잉과 폭력성을 예술성, 미학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국제영화제 수상이 영화세상과 현실세상이 접속된 논란을 불식시키는 면죄부가 아니란 점은 여전히 중요한 또 다른 사실이다.

유지나 동국대 연극영상학부 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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