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의미로 ‘운동’을 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운동사이]는 체력을 기르는 ‘운동’(Workout)과 페미니즘 등 사회 운동을 뜻하는 ‘운동’(Movement)을 전반을 아우르는 글을 씁니다. <편집자주>

▣ 양민영 작가는
여성의 삶과 페미니즘, 여성 운동에 관한 글을 칼럼 형식으로 신문에 연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운동을 하면서 느꼈던 경험을 토대로 겪은 편견과 이슈를 담은 페미니즘 에세이 『운동하는 여자』를 썼습니다. 스포츠를 통해 여성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여성 전용 스포츠 클럽인 ‘운동친구’라는 사회적기업을 설립했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폭염 주의보가 내려진 7월 3일 오후 서울 광진구 뚝섬한강공원 수영장이 물놀이 온 시민들로 붐비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폭염 주의보가 내려진 7월 3일 오후 서울 광진구 뚝섬한강공원 수영장이 물놀이 온 시민들로 붐비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싸울까?’

토요일 아침, 늦잠도 포기하고 수영을 선택한 나는 풀 안에서 골몰했다. ‘중급’이라고 써진 표지판을 보고 들어간 레일은, 수영 특공대를 방불케 하는 할머니들의 전유물이었다. 부대원은 총 여덟 명인데 그중 한 명이 사이드에서 잠시 쉬는 나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봤다.

나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말 그대로 ‘자유’ 수영이 아닌가. 내 속도대로 수영하다가 쉬고 싶을 때 쉬는 게 얼마든지 허용되는 시간이다. 게다가 나는 고급반에서 강습받았으니 내가 느리기보다 할머니들의 속도가 일정 수준을 초월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 명씩 돌아가며 ‘서 있지 마’, ‘빨리 가’하고 반말로 꾸짖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수영장 텃세인가? 특히 이 부대의 이인자이자 행동대장인 게 분명한 할머니의 행태가 도를 넘었다. 내가 한쪽에 서서 숨을 고르는 중에 다가와서 등을 손으로 밀며 윽박지르는 게 아닌가.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나고 말았다. 나는 전력으로 헤엄치며 이인자를 좇았다. 뭐라고 대거리를 시작하지? ‘할머니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정도면 될까.

이인자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는데 이번엔 다른 할머니가 말을 건다. 그는 바로 서열 최상위, 할머니들의 두목이었다. 두목의 말인즉 평영 자세를 고쳐보란다. 이왕 싸우는 거 두목과 싸울까?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그는 미소까지 머금은 얼굴로 다정하게 말했다.

“상체를 너무 많이 들잖아”

반목과 투쟁이냐, 화합과 평화냐. 잠시 갈등하던 나는 결심했다. 제일 자신 있는 영법이 평영인데도 자존심을 풀 밑바닥에 던져버렸다. 두목에게 평영을 가르쳐달라고 하면서 호호 웃었다. 바로 그때 나머지 일곱 명이 다가오며 화기애애한 두목과 나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역시나 눈치 빠른 이인자가 제일 먼저 가드를 내렸다. 그리고 놀랍도록 친근한 어투로 ‘서 있다가 다칠까봐 그랬지 잔소리한 거 아니야.’ 하고 변명을 늘어놨다.

그러는 사이에 운동이 끝났고 마지막 의식인 파이팅만 남았다. 나는 부장님이 노래할 때 탬버린을 흔드는 신입처럼 파이팅을 외친 다음 할머니들과 돌아가며 하이 파이브까지 했다. 풀 밖에서 지켜보던 직원들이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알고 보니 이들은 특공대가 아니라 수영장을 통째로 접수한 마피아였다.

용케 싸움은 피했지만 잘한 걸까?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이들은 당신네 집단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또 텃세를 부릴 게 분명하다. 하지만 억지 화합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나는 이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텃세는 분명 비합리적이고, 폭력으로 발전할 소지가 다분한 병폐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알고 보면 노골적인 텃세의 본질은 두려움이다. 어디서도 존중받지 못한 여성 노인에겐 수영장 레일 하나가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성역일 수 있다. 외부인만 보면 기를 누르고 세를 과시하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소중한 성역.

물론 체육관에서 운동할 때도, 페미니즘 운동을 할 때도 같은 여성에게 공격받은 기억이 가장 아프게 남는다. 나도 모르게 여성 집단을 이상화했다가 실망하고 기대를 거둔 적도 많다. 몇 번의 아픔 끝에 이제는 용감하게 싸우거나 비겁하게 순응할지언정 냉담하게 외면하지는 않을 수 있다. 유치하게 싸우고 화해하면 또 어떤가, 여자는 다 커도 애라는데.

양민영 『운동하는 여자』 저자.
양민영 『운동하는 여자』 저자.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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