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착취 온상 텔레그램 못 막는 ‘n번방 방지법’
“국제적 공조 강화하거나 강력한 대응해야”

ⓒ홍수형 기자
ⓒ홍수형 기자

미성년자를 협박해 성착취 영상을 찍어 유포한 디지털 성범죄 ‘n번방 사건’과 유사한 범죄가 또 발생했다. n번방 운영자들인 조주빈·문형욱이 각각 징역 42년형과 34년형을 받았지만 여전히 텔레그램은 범죄자들에게 은신처 역할을 하고 있어 국제 공조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KBS와 ‘추적단 불꽃’에서 활동한 대안 미디어 ‘얼룩소’의 원은지 에디터 등에 따르면 텔레그램에서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성착취 범행을 저지른 일명 ‘엘’(가칭) 등은 2019년 n번방 사건을 공론화한 ‘추적단 불꽃’을 사칭해 피해자들을 유인했다. 이들은 ‘텔레그램에 당신의 사생활과 개인정보가 유출됐다’며 겁을 주고 가해자와 대화하고 있으면 컴퓨터를 해킹해 가해자를 잡도록 도와주겠다고 접근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약점을 이용해 협박하고 성착취 사진과 동영상을 강제로 찍게 만든 뒤 이를 받아내 텔레그램 등에 유포했다.

이번 사건으로 드러난 문제는 크게 3가지다. 지난해 12월부터 이른바 ‘n번방 방지법’(개정 전기통신사업법 및 정보통신망법)이 시행됐으나 성착취의 온상인 텔레그램은 규제하지 못하는 점, 사이버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센터의 열악한 환경, 아동·청소년 대상 성착취물을 소지하거나 시청하는 경우는 처벌되지 않는다는 잘못된 인식이다.

정부와 수사당국, 뒤늦게 사건 수습

사건이 알려지자 정부와 수사 당국은 뒤늦게 사건 수습에 나섰다. 서울경찰청은 전담수사팀(TFT)을 꾸렸다.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지난달 31일부로 수사 인력을 기존 6명에서 35명으로 확대했다.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와 협업해 피해자의 국선 변호인 선임을 지원하기로 하는 등 피해자 대책도 마련했다. 수사팀은 엘을 추적 중인 가운데 피해자는 초등학생 포함 아동·청소년 6명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조직범죄 여부도 들여다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유포자뿐만 아니라 이를 시청하고 소지한 자들도 적극 수사하는 등 엄정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단순 시청·소지는 처벌되지 않는다는 잘못된 인식

그러나 아동·청소년 대상 성착취물을 소지하거나 단순 시청하는 경우는 처벌되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관련 범죄 비율이 높았던 것으로 분석된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사이버수사국은 지난해 3월 2일부터 10월 31일까지 ‘사이버성폭력 불법유통망유통사범 집중 단속’을 벌인 결과 1625명을 검거하고 이중 97명을 구속했다. 피의자 연령대는 20대가 33.3%(541명)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고 10대(29.2%), 30대(24.3%)가 그 뒤를 이었다. 경찰청 관계자는 “일부 피의자들은 구매·소지·시청 행위는 범죄가 아니라고 잘못 인식했다”며 “자신의 행위가 경찰에게 포착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피해자 지원 센터의 인력 부족

여성가족부는 이번 n번방 사건과 관련해 불법촬영물 삭제하는 등 피해자를 지원 중이다. 여가부 산하 기관인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선 피해자와 수사기관을 연결해주는 등 피해자에게 필요한 분야를 지원한다. 여가부 관계자는 6일 “센터에선 현재 삭제 지원, 의료 및 법률 지원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인력 충원 등에 대한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여가부 관계자는 “인력 증원은 예산과 관련된 부분이라 아직 반영된 바 없고 상담사들의 정규직화를 일차적으로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앞서 여성단체들이 전국에서 발생한 사이버성폭력을 지원하기 위해 발족한 연대체인 ‘전국 사이버 성폭력 피해지원 네트워크’(전사넷)은 여가부가 지난해부터 운영 중인 ‘디지털 성범죄 지역 특화상담소’에 상담원이 2명뿐인 점을 지적하며 인력을 충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전사넷은 지난달 26일 발족선언문을 통해 “특화상담소 상담원 2명이라는 한계로 인해 각 상담소는 피해지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는 엘과 관련된 불법촬영 성착취물을 접속 차단했다. 지난 5일 방심위는 엘 관련 미성년 피해자 불법촬영 성착취물 523건을 긴급심의해 지난달 31일부터 접속 차단했다. 해외 불법사이트에서 유통되는 미성년 피해자의 성착취물에 대해선 국내 이용자의 접근을 제한하고 해외 사업자에게 원 정보 삭제도 요청했다. 또 경찰청이 ‘공공 DNA DB’로 등록해 달라는 요청에 따라 엘 관련 성착취물 429건을 ‘불법촬영 영상물 확인’으로 의결했다. 공공 DNA DB란 불법촬영물의 특징을 추출해 편집·변형된 파일도 적극 차단할 수 있도록 구축한 데이터베이스다. 해당 착취물들은 향후 이용자 접근 제한 등 필터링 조치를 통해 국내 인터넷사이트에서 유통이 차단된다.

‘n번방 방지법’ 법망 피한 텔레그램

디지털성범죄를 막겠다고 지난해 12월부터 시행된 ‘n번방 방지법’은 해외에 서버를 둔 텔레그램에서 활개를 치는 성착취 범죄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엘이 텔레그램 채팅방에서 ‘절대 (경찰에)잡히지 않는다’며 자신감을 드러낸 이유기도 하다. 텔레그램은 통신의 비밀과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n번방 방지법 적용 대상에서 빠져 있다. 인터넷 사업자의 불법촬영물 등 유통방지 책임을 강화하는 전기통신사업법‧정보통신망법은 공개된 온라인 공간만 대상으로 한다. 또 단체방뿐 아니라 사적 대화방에 올라온 정보도 인터넷 사업자에게 성범죄물 삭제 등 조처를 하도록 한 개정 정보통신망법 및 정보통신망법상 규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앞서 방송통신위원회는 사적 대화방의 디지털성범죄물 유통 방지 대책으로 신고포상제와 경찰의 잠입수사 등을 제시했지만, 결과적으로 미성년 성착취 사건을 막지 못했다.

계속된 n번방 사건을 잡기 위해선 국제 공조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n번방 대응 국제협력 강화법’을 발의한 허은아 국민의힘 의원은 6일 “국경을 넘나들며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 사건에 신속히 대응하기 위해 국제 공조가 필수적”이라며 “최근 OECD 사무총장께 디지털 성범죄 대응을 위한 국제 공조 강화를 요청드리기도 했지만, 우리나라의 부다페스트 협약 가입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달 19일 마티아스 콜먼 OECD 사무총장에게 디지털 성범죄 예방과 피해자 보호를 위한 국제적 공조 강화를 요청하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권주리 십대여성인권센터 사무국장은 텔레그램에 대한 강력한 제재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 사무국장은 “우선 ‘제2의 n번방’이라고 불리는 것도 부적절하다. 수십만번째 n번방도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며 “브라질 대법원에선 브라질 연방경찰의 반복된 협조 요청에 응하지 않았던 텔레그램을 자국에서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차단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자 텔레그램의 최고경영자가 브라질에 직접 사과하고 앞으로 경찰에 협조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며 “우리도 해당 플랫폼에 대해 강경한 대응이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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