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우리말 쓰기] ⑭ 추석과 성평등한 언어

ⓒ여성신문
ⓒ여성신문

명절이면 언론에 단골로 등장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부모 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말조심’ 기사가 대표적인데요,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자녀 세대에 결혼 계획과 2세 계획, 취업 여부를 묻지 말라는 내용이지요. 가족의 평화를 위해 정치 얘기도 삼가라고 합니다. 명절 연휴 정치인들의 최대 관심사가 밥상머리 민심정치이지만 가족 간에는 그다지 좋은 명절 소재가 아니지요.

명절을 즈음하여 나오는 기사

저는 명절이면 관심을 두고 찾아보는 기사가 있습니다. ‘온 가족이 평등하고 행복한 명절’에 관한 기사입니다. 여성계에선 오랜 세월 평등한 명절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인식을 개선하고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해 왔는데요, 언제부턴가 이런 논의를 기사로 찾아보기가 어렵더군요. 논의의 부재인지, 기사화의 부재인지 알 수 없지만 평등한 명절문화에 대한 논의가 후퇴한 것 같아 무척 씁쓸했습니다. 올해는 추석을 앞두고 기사 하나가 언론을 달구었습니다. 성균관 기사였는데요, 성균관은 유교가 현대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자성과 함께 차례상에서 중요한 건 음식의 가짓수가 아니라 가족의 합의라는 파격적인 발표를 했습니다. 경제적 부담과 남녀·세대 갈등 해소의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하는 변화된 모습에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자취를 감춘 ‘평등’에 아쉬움이 컸습니다.

평등은 언어에서 시작

평등하고 행복한 명절의 시작은 노동의 나눔일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의견을 맞춰가는 과정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앞서는 건 ‘성평등한 언어’입니다. 성별에 따라 언어가 불균형하게 쓰이는 문제는 오래전부터 지적돼 왔는데요, 특히 결혼으로 형성되는 가족관계에서 남성 쪽만 존칭을 사용하는 것은 여성계를 떠나 각계에서 거론되어 왔습니다. 남성 쪽은 시댁, 도련님, 아가씨처럼 높여 부르는 반면, 여성 쪽은 친정, 처가, 처남, 처제로 부르는 식이지요. 특히 ‘시집가다’는 여성이 남성의 집안으로 들어가는 전통적 성 가치관이 반영된 말인데요, 광운대 김소영 교수는 “언어에 반영된 고정관념은 차별적인 인식을 강화한다”고 단언합니다.

국립국어원이 2020년 발간한 ‘우리, 뭐라고 부를까요?’는 이런 성 불평등한 가족 간의 언어에 어느 정도 길잡이가 되어줄 것 같습니다. 가족 호칭을 정비한 책인데요, 시댁과 친정(처가)을 나누지 말고 ‘본가’를 사용하라는 부분이 눈에 띕니다. 특히 성인이 된 자녀들이 1인 가구로 분가한 최근의 상황에서 이들도 사용할 수 있는 ‘본가’를 추천한 것이지요. 또 당사자나 부르는 사람 모두 불편해하는 서방님‧도련님‧아가씨는 서로 불편해하지 않는 선에서 이름 뒤에 존칭의 ‘씨’를 붙이라고 제안합니다. 이름을 부르기도 불편하다면 자녀의 이름을 넣어 ○○ 삼촌, ○○ 고모처럼 불러도 된다고 하는데요, 국어원은 어떻게 부르든 서로 존중과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호칭법엔 정답이 없다면서 서로 합의하에 정해도 좋고 가족의 전통을 따라도 좋다고 ‘열린’ 제안을 했습니다.

호칭 하나 바꾼들 그게 뭐 대수일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홍미주 경북대 교수에 따르면 언어는 그 자체로 강제력이 있어 사람들의 경험과 사고방식을 규정합니다. 성 불평등한 가족 호칭어는 남성 중심의 가족문화를 강화할 수 있지요. 홍 교수는 이런 불균형적인 언어를 균형적인 언어로 바꿔 사용하는 것은 모두가 배려받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라진 ‘가윗날’

추석(秋夕)의 순우리말에는 한가위와 가윗날이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만 해도 이 두 단어가 일상과 언론에서 자주 쓰였는데요, 어느 순간 가윗날은 그 쓰임을 볼 수 없게 됐습니다. 한가위는 주로 ‘풍성한~’이라는 말과 함께 제한적으로만 쓰이게 됐고요. 학자들에 따르면 이 두 단어는 신라의 가배(嘉俳)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요, 중국 ‘예기(禮記)’에서 유래된 추석보다도 훨씬 앞서 사용된 순우리말이라고 합니다. 올 추석에는 가족 모두가 소외되지 않는 성평등한 말과 함께 사라진 가윗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시면 어떨까요?

그럼 독자님들, 가족과 함께 정겹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