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낭산 선덕여왕릉. 사진=뉴시스
경주 낭산 선덕여왕릉. 사진=뉴시스

신라는 한국 역사상 유일하게 여왕이 존재했던 나라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셋이나 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기록상 최초의 여왕으로 등장하는 선덕여왕은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혹은 성골인 남자가 없어서 왕위에 올랐다고 얘기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같은 역사서들이 그렇게 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덕여왕 사후 500~600년 후 가부장제 사고에 젖은 유학자와 승려가 남긴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특히 김부식은 선덕여왕을 두고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평을 남긴 사람이다.

선덕여왕이 아들이 없어 즉위한 예외적 인물이라면 그녀 뒤로 두 명의 여왕이 더 있었다는 사실도 어색하다. 특히 진성여왕은 “옛날 선덕과 진덕의 고사를 따라” 그녀를 왕으로 받들라는 정강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아들(남자)이 없으므로”와는 상당히 다른 문맥이다.

이런 관점에서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의 비인 알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영은 왕의 내조자가 아니라 혁거세와 함께 “두 명의 성인”으로 불린 독립적 여성이었다. 당시는 제정일치 시기였으므로 두 명의 성인은 두 명의 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 동아시아 고고학의 권위자인 사라 넬슨은 신라 초기에는 부부가 함께 왕권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남성 왕의 역할은 주로 전쟁과 관련됐고, 종교적ㆍ세속적 통치권은 여성 왕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역사는 선덕여왕의 탄생이 돌출적인 예외라기보다 이전 시기 여성 왕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런데 이 오래전 여성권력은 신라의 강력했던 여신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알영은 신라를 대표하는 가장 우뚝한 여신인 서술성모의 딸로서 자신의 신화를 지닌 인물이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여왕들을 배출했던 신라는 한국 역사상 가장 여신숭배가 두드러졌던 나라이기도 하다.

여신신앙이 뒷받침해 준 여성권력이라는 관점에서 선덕여왕을 보면 그 동안 잘 보이지 않았던 사실들이 부각된다. 하나는 선덕여왕을 길상천녀같은 존재라고 한 최치원의 기록이다. 길상천녀는 힌두교의 여신 락슈미가 불교화한 여신이다. 다른 하나는 여왕에게 특별히 올려진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호다. 이는 ‘성스런 조상을 둔 하늘여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성스런 조상”은 혁거세와 알영의 어머니인 서술성모로 추정된다.

지면의 제한으로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신라의 여왕들을 여신신앙과의 관계에서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신라는 모계/여계 존중이 두드러졌고, 화랑 이전에 원화제도가 있었으며 왕의 사위도 왕이 될 수 있었던 특별한 나라였다. 또 혼인이 자유로웠고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했으며 모든 계급의 여자들이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이런 신라사회의 특성들 역시 신라 토착신앙의 중심에 있었던 여신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신화와 역사 속 여성 리더십] 칼럼은 전라남도 양성평등기금의 지원을 받은 (사)가배울 살림인문학 아카데미  강연의 요약본입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