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송경철 YTN 앵커
1988년 방송국에 입사, 2022년 정년퇴임
“끝이 아닌 멈춤, 또 다른 출발선에 섰다”

 

송경철 YTN앵커 ⓒ홍수형 기자
 송경철 YTN앵커는 35년간 뉴스룸에 출근한 국내 최장수 앵커다. YTN에서만 28년간 앵커로서 뉴스데스크를 지켰다.  ⓒ홍수형 기자

“국내외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35년간 뉴스룸에 출근한 국내 최장수 앵커, YTN에서만 28년간 앵커로서 뉴스데스크를 지킨 송경철 YTN 앵커는 10월 29일 밤 ‘뉴스와이드’의 문을 열며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인사로 시작했다. 10월을 끝으로 YTN에서 정년퇴임하는 그는 마지막 뉴스도 ‘송경철 답게’ 마무리했다.

“방송 일이라는 게 하루살이 같아요. 하루하루 뉴스를 쫓으며 살았어요. 매일 하루의 이슈를 처리하기도 바빴죠. 그 하루하루를 모아보니 어느 덧 35년이 흘렀고 어느새 마지막 뉴스를 하는 날이 오더군요.” 

뉴스를 준비하는 송경철 앵커. ⓒYTN
뉴스를 준비하는 송경철 앵커. ⓒYTN

1988년 제주MBC 아나운서로 시작
SBS 거쳐 YTN서 기자로 새 출발

인생의 절반을 뉴스와 함께 한 그는 시청자들에게도 중후한 이미지와 묵직한 목소리로 친숙한 앵커다. 드라마 ‘모래시계’, 영화 ‘간첩’, ‘내부자들’, ‘아수라’, ‘협상’ 등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 앵커로 등장하면서 “5000만 배우”라는 별명도 붙었다. 출연작의 관객 수를 모두 더하면 5000만명은 거뜬히 넘긴다는 뜻이다. 지난해에는 ‘아시아문화경제진흥원 방송 부문 대상’, ‘장한 고대 언론인상’을 수상하며 30여년의 노력도 인정받았다.

그가 처음 방송국에 발을 디딘 것은 35년 전인 1988년. 고려대 국문학과를 다니며 기자의 꿈을 키우던 그는 아나운서로 제주 MBC에 입사했다. 묵직하면서도 온기 있는 목소리의 장점을 살려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특히 지역 방송국의 ‘별이 빛나는 밤에(별밤)’ 진행을 맡아 별밤지기로 활약했다.

“별밤은 방송을 배운 프로그램이자 평생 동반자인 배우자를 만나게 해 준 고마운 프로그램이죠.”

송 앵커는 당시 별밤 PD였던 아내 김혜숙씨와 만나 1990년 결혼했다. 이듬해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1991년 국내 첫 지상파 민영방송사인 SBS가 개국하면서 아나운서를 채용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남성, 여성 아나운서 각 한 명씩 뽑는다는 소식에 경력 공채 지원자만 1000명이 몰렸다고 들었어요.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제가 어느 정도까지 되는지 해보겠다는 생각에 도전했어요. 운 좋게도 제가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됐죠.”

SBS에서 3년 넘게 데일리 프로그램을 맡아 ‘365일 출근하는 남자’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성실히 뛰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으나 마음 한편에선 늘 갈망이 있었다.

“아나운서로서 뉴스데스크에서 소식을 전달했지만 가슴 한켠에선 늘 현장을 뛰고 싶다는 생각, 기자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게다가 아나운서는 연차가 높아지면 스포츠 중계를 많이 맡았는데, 당시에는 흥미가 없는 분야라 방향성에 대한 고민도 컸죠. 그때 선배 이계진 아나운서의 말이 가슴에 탁 와 닿았죠. ‘매미가 여름에 울기까지 7년을 땅속에서 때를 기다린다’는 말이었어요. 제주MBC와 SBS에서 아나운서로 일한 시간이 딱 7년이었어요. 신문보급소를 운영했던 할아버지, 신문기자였던 큰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들으며 키워왔던 기자라는 꿈을 꼭 한번 펼쳐보고 싶었어요. 때마침 YTN이 개국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생각이 들었죠.” 

송경철 YTN앵커 ⓒ홍수형 기자
송경철 YTN앵커 ⓒ홍수형 기자

원고 첫 장엔 늘 ‘팩트 균형 존중’
균형은 철칙… 한결같음으로 신뢰 쌓아 

1995년 개국한 보도전문채널 YTN은 기자라는 꿈을 펼치는 새로운 무대였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던 해였다. 7년차 아나운서는 그간의 경력을 뒤로 하고 신입기자로서 새 경력을 쌓기로 결단을 내렸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경찰서를 훑는 사스마와리(경찰서 방문 취재 관행 일본식 표현)부터 시작했어요. 당시 언론사 관행대로, 원칙대로 하겠다고 말씀 드리고 사서 고생을 했지요. 어느날 경찰서 형사계에 들어갔더니 한 경찰이 ‘왜 영화 안하고 기자하느냐’고 묻더군요. 그 사람 눈엔 기자스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아나운서 물이 빠질 때까지 일선에서 뛰었죠.”

그의 인생은 19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만나면서 또 다시 휘몰아쳤다. 24시간 보도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YTN은 붕괴 사고 발생 8분 만에 1보와 함께 목격자의 생생한 증언을 방송했다. 이후 24시간 내내 구조현장을 지키며 실종자와 생존자 소식을 전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실종자 가족이 모여 있던 서울교육대학 체육관에 큰 화면이 설치됐고 24시간 내내 현장 소식을 보도하던 YTN 뉴스가 그 화면을 채웠다. 송 앵커는 아나운서 경력을 살려 뉴스데스크에서 속보를 수시로 전달하고 긴급한 상황을 정리했다. 아나운서로서의 진행 실력과 현장에서 쌓은 노련함을 더해 앵커로서 보도에 신뢰감을 더했다. 앵커로의 도약이다.

이후 송 앵커는 2004년부터 7년간 앵커 팀장으로 뉴스팀을 이끌었다. “그 시기 YTN이 9년 연속 공정 방송 1위를 기록했어요. 구성원 모두가 이룬 성과였어요. 저도 자랑스러웠습니다.”

송 앵커는 뉴스 시작 전 원고 맨 앞장에 꼭 ‘팩트 균형 존중’이라고 적는다. 공정 방송을 위해 지켜온 세 가지 원칙이다. “진영 논리, 집단주의 등 이른바 떼거리즘에 끊임없이 맞서 왔어요. 보도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어요. 한동안은 투표도 안할 정도로 스스로를 검열했지요. 앵커는 공인으로서 반드시 균형을 지켜야 한다고 배웠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균형을 깨뜨리는 자리는 경계했고요. 그런데 최근 ‘기계적 균형은 필요없다’는 말도 들립니다. 거침없이 비판하는 후배들도 있지요. 세상이 달라지며 제 생각이 지금과는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좀 소란스럽더라도 채널, 프로그램, 조직에 관해 활발히 토론할 수 있는 조직 문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YTN에서는 퇴임하지만, “끝이 아니라 멈춤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아나운서에서 기자로, 다시 앵커로 새로운 도전을 마다하지 않던 그는 60대에 들어서며 또 다른 도전도 꿈꾼다. 새로운 형식의 방송을 통해 시청자를 만나거나 관리자로서 방송국 경영에도 참여하고 싶다는 의지를 비췄다. “또 다른 출발선에 섰다”는 그는 마지막을 장식하는 특별한 인사는 준비하지 않았다고 했다. 평소처럼 간명하게 끝냈다. 한결같음, 그것이 ‘송경철다움’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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