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페인티드 베일’(The Painted Veil) 2007

영화 ‘페인티드 베일’.
영화 ‘페인티드 베일’.

“일주일 후면 시들 것을 알지만 그래도 예쁘지 않은가.”
“장점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알고 있을까. 안다면 해결점과도 연결되는 건 아닐까. 알게 만드는 힘만이 지속을 보장하는 건 아닐까. 우수한 독자와 관객은 자율학습을 좋아한다. 찾아내서 신나고 즐거워 또 도전한다.

한여름의 들판, 멀리 들리는 천둥소리. 분리돼 놓인 짐가방과 각자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두 남녀(부부로 보이는). 그들이 향한 방향의 각도. 둘 사이의 정적과 주변 초록의 생동감. 현재 시점의 이 풍경이 관객을 끌어당겨 서둘러 이야기를 들려준다.

1920년대 런던, 상하이, 메이탄푸(계림의 산야와 이강). 키티(나오미 와츠 분)의 집 파티에 온 월터(에드워드 노튼 분)는 처음 본 키티에게 반하고 다음날 키티의 집을 방문했을 때 곧바로 청혼한다. 두 번 모두 키티 아버지의 초대였으므로 검증 마친 사윗감인 월터의 청혼은 수줍음 속에서도 활기와 자신감에 차 있고 어머니가 빨리 결혼시켜 내보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키티는 청혼을 받아들인다. 딸의 혼사를 둘러싼 동서고금의 클리셰를 향한 모옴의 시선은 냉혹하고 다수의 여성 관객은 가슴이 아린 가운데, 두 남녀의 자유연애 장면이 소실된 시작으로, 결혼해서 잘 살았다는 얘기는 분명 아니다.

W. S. 모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페인티드 베일>. 2006년 처음 상영됐을 때의 긴 여운 때문에 디비디를 사두었는데 이제 그 이유가 정리된다.

과학이 ‘발견’이면 사랑은 ‘관찰’

이성을 감정의 반어로만 사용할 생각이 아니라면 월터와 키티의 관계 회복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월터가 현미경 렌즈 속에서 뭔가를 발견하듯 키티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미술관을 거닐다 어떤 작품 앞에서 발을 멈추는 행위를 닮아있다. 그러나 이 발견은 지속적 후속 행위로 이어지지 않고 결혼을 행복의 충분조건으로 단순 규정하면서 두 사람은 준비 없는 ‘모험’으로 빨려든다.

남녀관계에서 통상 둘 중 한 사람의 끌림이 더 강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느끼는 쪽이 관계의 리더가 되어 힘을 행사하는데 리더라고 해서 완전할 수 없고 문제에서 벗어나 있지도 않다는 것이 스토리의 중심에 ‘정직하게’ 위치한다. 이 정직함이 월터의 고뇌로 녹아들어 관객을 뒤따르게 한다. 모옴의 소설에서 자주 보이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남녀관계에 대한 통찰이, 두 주연배우의 캐릭터 소화력과, 아편전쟁 이후 영국인에 대한 중국민의 적대 감정이라는 역사적 배경, 자연의 웅대한 미장셴과 합쳐져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로만 보기 어려운 감정의 묵직한 여운을 만든다. 

영화 ‘페인티드 베일’.
영화 ‘페인티드 베일’.

삶, 사랑, 의무

젠틀하고 유능할 뿐 아니라 수줍어하면서도 서슴없이 감정을 표현하는 세균학자 월터. 현재 일하고 있는 정부 실험실이 있는 중국으로 가야 한다는 것과 키티 아버지와 이미 나눈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다소 급해 보이는 청혼의 개연성으로 준비돼 있다. 키티의 외모와 아버지의 인정이 이끌림의 요인이라는 데 공감하긴 해도 월터가 사랑을 확신하기에는 불안정한 요소인 가운데, 이러한 선택을 처리해내는 월터의 방식이 영화 전체를 힘 있게 쥐고 대사에 집중하게 한다.

‘언제까지 아버지가 먹여 살려야 하느냐’는 어머니의 모욕적인 대사를 묵인하는 아버지에게서 키티는 이제 다른 보호자에게로 옮겨간다. 꽃 한 송이 살 경제적 능력이 없는 키티에게 결혼 조건으로서의 사랑은 자신이 누릴 권리가 아니며 무엇 하나 결정할 능력 또한 준비돼 있지 않다. 성인의 권리는 경제적 독립으로 생기고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정신적 환경은 자아확립이기 때문이다. 키티는 모든 것을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의존은 ‘위태로운 휘둘림’을 의미한다.

월터를 향한 투정과 빈정거림, 상하이 부영사 찰리(리브 슈라이버 분)와의 베드신에서 들리는 동문서답과도 같은 대화. 월터와 함께 걷는 신에서의 무심함, 처음 상하이에 도착한 신혼집, 비 오는 날의 언쟁 신으로 이어지는 결핍의 대화에서 진즉부터 의아한 모옴의 시선 속 ‘여성’이 본격적으로 궁금해진다.

찰리와의 부정한 관계를 알게 된 월터. 콜레라가 창궐하고 있는 메이탄푸로 ‘왜 내가 함께 가야 하느냐’는 키티의 저항에 이미 결혼의 필수 요소인 사랑이나 의무가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월터는 뜬금없는 ‘내조(cheer and comfort me)’를 제시한다. 사랑의 실천적 진수가 묻어있는 평범한 대사가 뒤늦게 월터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이다. 실천의 동기유발 요소인 ‘꽃(사랑)’이 없는 상황에서. 

영화 ‘페인티드 베일’.
영화 ‘페인티드 베일’.

성장, 두 개의 팽이

‘없는 것’은 찾을 수 없다. 세균학자인 월터의 현미경으로 비유되는 ‘눈’(몸과 마음의 양면적)으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자신의 욕구를 해결하게 하는 것은 후속 행위들, 즉 독립된 두 개체의 상호 작용을 가능케 하는 도구인 ‘대화 능력’과 대화를 위한 물리적 ‘시간’의 투자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갈망하는 것을 ‘사랑’으로 이름하려는 것이 ‘자유’에 속한다면 막을 길은 없고 사랑의 행위의 으뜸이 ‘관심의 지속과 표현’이라는 생각에 반대할 사람도 없다.

“피아노는 없어요?”이 질문에 “나 피아노 안 쳐요”는 적절한 반응이 아니다. “꽃 좋아하세요?”물었을 때 “네” “아니오”가 분명한 대답인 것처럼. “비가 많이 오네요.”라는 말은 대꾸할 필요가 없는 말일까.

결혼에 기꺼이 발을 내딛은 부부를 자아(구심력)와 배우자와의 교감 능력(원심력)을 버팀목으로 외부의 힘(채찍)을 받아내 도는 두 개의 팽이에 비유해보자. 일에 몰두하는 월터 옆에서 키티가 구심력(자기 가치)을 찾는 것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 보인다. 이것도 ‘사랑’이라는 추상성 속에서 찾아지기에 그리도 희구하는 건 아닌가.

병마와 싸우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도하고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월터를 보게 되고 수녀들이 있는 고아원에서 피아노를 치고 아이들을 돌보며 자아를 찾아 일어서는, 월터가 만나는 ‘새로운 키티’는 그래서 제법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위인전이 아닌 영화 속에서 월터의 캐릭터가 어려운 이유는 자기 가치를 알기 위해 타인의 인정보다는 자신의 인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집요하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제2의 보호자’라는 지위를 획득하는 배우자로 인해 수정, 형성되기도 하는 건강한 자아와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확장하면서 밀려들 평범한 ‘행복’은 두 주체의 권리이며 살아가는 동안 자신에 대한 예의이며 의무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늦더라도 기회를 놓치지 말 것.

키티의 바람개비에서 거대한 물레방아로 바뀌는 장면을 만들 줄 알았던 그는 누구인가. 모옴의 심리분석을 여과해서 재배치하는 존 커렌 감독의 시선이 경쾌하다. 열렬하고 우수한 독자다.

필자 : 문수인(시집 보리밭에 부는 바람의 저자, SP 영화 인문학 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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