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작가 샤힌 아크타르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강간 생존자
‘비랑가나’ 입장에서 방글라데시 역사 바라봐

작가 샤인아크타르 ⓒ홍수형 기자
작가 샤힌 아크타르ⓒ홍수형 기자

2차 세계 대전 이후 사람들은 국제사회를 냉전 시대라 부른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은 대립시대라는 뜻이다. 그러나 아시아 여성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전쟁 이야기를 했다. 베트남 전쟁,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인도네시아의 군사쿠데타, 미얀마의 88항쟁, 중국의 천안문사태, 스리랑카 내전 그리고 우리의 광주 민주화 운동. 아시아는 포탄과 총알이 난무하는 뜨거운 불바다였다. 그 많은 무력분쟁은 왜 아시아에서 일어났고 주목받지 못했을까?

지난 10월 28일 여성신문 사옥에서 방글라데시에서 온 작가 샤힌 아크타르(Shaheen Akhtar)를 만났다. 그는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주최한 ‘여성인권과 평화국제 컨퍼런스: 전쟁, 식민주의와 여성폭력’에 연사로 초대돼 내한했다. 그는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중 강간 생존자 ‘비랑가나’ 이야기를 다큐소설로 써 제3회 아시아 문학상을 받았다. 우리나라에는 방글라데시어를 한국어로 번역헌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전승희 역)와 영어로 번역된 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작전명 서치라이트』(유숙열 역) 두 가지로 출판됐다.  

*‘비랑가나’란,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중에 파키스탄 점령군에 성노예로 학대당한 방글라데시 여성 희생자들을 말한다. 방글라데시는 전후 강간 생존자들에게 ‘여성영웅’이라는 뜻의 비랑가나라는 칭호를 붙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정권이 바뀌면서 비랑가나는 여성들에 대한 낙인이 됐다.  

샤힌 아크타르 작가의 책은 방글라데시어를 한국어로 번역해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전승희 역)와 영어로 번역된 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작전명 서치라이트』(유숙열 역) 두 가지로 출판됐다.  
샤힌 아크타르 작가의 책은 방글라데시어를 한국어로 번역해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전승희 역)와 영어로 번역된 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작전명 서치라이트』(유숙열 역) 두 가지로 출판됐다.  

최형미(이하 최): 책의 원제가 탈라시(Talaash), 영어로는 더 서치(The Search)다. 제목이 의도한 바는 무엇인가?

샤힌 아크타르(이하 샤인): 더 서치는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있었던 사건을 다큐소설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군사정권 아래서 전쟁 강간 생존자 비랑가나 이야기는 묻혀있었다. 민주정부가 들어서며 1996년에 조사를 시작하였다. 사건 발생 이후 25년이 지나서였다. 더 서치라는 뜻은 자신을 감춘 비랑가나를 찾는다는 의미이고 그들이 숨겨놓은 언어를 찾는다는 의미다.

2000년에 위안부 할머니의 문제를 다룬 도쿄시민 법정에 참석해 김학순을 만났다. 그의 증언은 영감을 주었고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비랑가나 진상조사를 하고 5년이 지나서였다. 쓰고, 멈추고, 다시 조사했다. 그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수용소는 어떤 곳이었을까 상상하며 글을 이어갔다. 2011년 영어로 출간되었고, 이후 전승희 교수(번역자)가 방글라데시를 찾아와 함께 범행장소를 방문하며 학살 장소를 보여주었다. 전승희 교수를 통해 국제사회에 알려졌으니 그를 만난 건 행운이다.

최: 첫 번째 증언자는 누구인가?

샤힌: 조사단이 꾸려지고 비랑가나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초의 증언자는 정말 뜻하지 않는 곳에서 찾았다. 우리가 잘 아는 분이었다. 조사단 사무실이 입주하기 전 그곳을 사용해왔던 조각가 페르도우시 프리야바시니(Ferdousi Priyabhashini)였다. 우리는 그에게 파키스탄군인에게 강간당한 여성을 알면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사무실에 자주 들렀다. 그리고 어느날 자신이 바로 비랑가나였다고 말했다. 그분의 이야기를 작은 카세트 테이프에 담았다. 그는 다음날 다시 찾아와 또 다시 이야기를 했다. 다양하고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였다. 그는 파키스탄 군인들에게 집단강간을 당했지만 다시 일을 해야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파키스탄군의 협력자라고 비난했다.

최: 사람들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지나올 때 자신이 당연하다고 알고 있었던 것을 부수고 새롭게 세상을 보게된다. 존재론적 혁명을 경험한다. 비랑가나라고 고백한 페르도우시는 어떻게 변화했나?

샤힌: 페르도우시는 이후 여성운동가나 시민사회의 환영을 받았고 인권상을 받기도 하며 활동을 확산해갔다. 그것이 변화라면 그런 식으로 삶이 바뀌었다. 그러나 진짜 변한 것은 나였다. 생존자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고, 이런 일들이 어디서나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이 생존의 문제였다는 것을 알았다.

최: 비랑가나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차이와 공통점은?

샤힌: 이름이 다르다. 그리고 위안부 이슈는 오랜시간, 넓은 지역에서 일어난 구조적 범죄다. 하지만 비랑가나는 개인적인 경험들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들 모두 극단적인 폭력을 경험했다. 전쟁 이후의 경험은 공통적인 것 같다. 예를 들어 비랑가나는 남편을 찾기 어려웠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비랑가나와 결혼하는 사람에게 지참금을 주고, 공무원이 될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남자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결혼한 여성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결혼 후 남자들은 ‘당신은 강간당했고 깨끗한 여자가 아니다’ 라고 말해 결국 이혼했어야 했다.

최: 소설에서 메리엄의 아버지와 남동생 이야길 쓸 때 어떤 의도가 있었나? 아시아 여성들은 남성뿐 아니라 가난 그리고 식민주의 등과 싸워야 하기에 남성은 적이며 동시에 동지이기도 하다.

샤힌: 1971년은 남성지배가 가득찼지만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그들과 협력한다. 전쟁 후는 상황이 달라진다. 아시아를 일반화하기 어렵다. 내 남동생은 나를 돌보려 하고 친절하며 나를 걱정한다. 가족 사이에서 용서와 친절은 중요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인생의 최초의 적이었다. 

작가 샤인아크타르 ⓒ홍수형 기자
샤힌 아크타르 작가 ⓒ홍수형 기자

최: 서구 페미니스트들은 아시아 여성이 가족에 묶여 산다고 비판한다. 당신에게 가족이란 무엇이며 당신의 어머니는 어떤 분인가?

샤힌: 나는 연로한 어머니와 남자 형제와 자매가 있다. 오랫동안 혼자 살다가 친구 같은 남자와 결혼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랐다. 내가 어머니보다 더 똑똑해서 그를 대하는 것이 쉬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실용적이지 않으며, 많은 것을 용서하고, 완벽하지 않으며 많은 요구를 하지 않았다. 최근에 약간 치매 증상이 생겨 긴 시를 외우고는 자기가 썼다고 말한다.

당신이 가족을 묻는다면 나는 친구를 가족 안에 넣겠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나는 친구들과 함께 지냈다. 여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친구와 나눈다. 하지만 남자들은 그렇지 못한다. 가부장제 사회가 아무리 여자들을 고립시키려 해도 여자들은 가족과 이웃 안에서 친구를 만들어왔다. 친구란 삶의 일부다.

최: 메리엄의 남자친구인 아베드는 정치적으로 진보적이지만 임신한 메리엄을 외면한 이기적인 남자다. 왜 민주화 운동을 한 많은 남성이 정치적으로 진보적이지만 젠더 문제는 그렇지 않을까?

샤힌: 책을 쓰기 시작할 때 여러 책과 인터뷰 자료를 살펴보았다. 여성들은 비랑가나 캠프에 있을 때는 죽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왜 죽지 않았느냐고, 왜 가족을 괴롭히냐고 말하는 순간 죽고 싶어 했다. 여성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등을 돌리는 순간 죽고 싶어 한다. 전쟁은 일정한 시간에 일어났지만 그 이후 여자들은 오랫동안 이런 일에 노출된다. 게다가 남자들은 비랑가나에게 접근하며 ‘당신이 파키스탄 남자와 관계가 있다면 나에게도 기회를 달라’며 접근한다. 

최: 한국은 지금 젠더 갈등이 중요한 이슈다. 청년 남성들은 자신들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샤힌: 방글라데시는 거리가 위험하다. 폭력적인 사회다. 남미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래도 한국은 안전한 곳이 아닌가? 특히 방글라데시의 가정폭력은 심각하다. 지참금 제도가 여전히 있어 시어머니와 가족들의 학대가 심각하다. 한국 여성들처럼 밖에 나가 시위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최근에는 히잡을 쓰지 않으면 거리에서 쉽게 성희롱을 당한다. 많은 여성들이 공장에서 일을 하는데 그곳에서는 성희롱과 성추행이 만연하다. 그러나 여자들은 그런것에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경제적으로 돈을 벌고 독립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젠더 갈등은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여성인권이 발전했기에 생겨난 일이 아닌가?

최: 위안부 여성운동은 우리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섹슈얼리티, 민족, 전쟁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게 했다. 비랑가나 이슈는 방글라데시에 어떤 변화를 추동했나?

샤힌: 한국은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그렇지 않다. 독립 이후 사회주의 정부가 5년 정도 비랑가나를 지원했다. 그러나 군사 정권 아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990년 민주 정부가 다시 이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강간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다. 여성운동가들은 비랑가나를 ’투사‘라고 불렀지만 자신의 문제로 껴안지 못했다.

최: 한국에서 여성가족부 폐지가 정치적 이슈다.

샤힌: 위안부 문제를 체계화 시키는 등 한국의 여성운동이 강하게 이뤄진 것은 여성가족부의 역할이 크다고 본다. 한국사회는 여성가족부를 지켜야 한다. 육아문제를 해결하고 여성의 삶이 증진된다고 남성들이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지 않나? 방글라데시에도 여성부가 있다. 혁명적이지 않고 진보적이지 않다. 그러니 그들을 통제하거나 폐지하려는 말도 없다.

우리는 전시 성폭력 이야기를 했다.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주권이 훼손되었던 여성들 이야기다. 숨어 있는 그들을 서치(search)하고 그들의 경험을 나타낼 단어를 서치(search)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뷰 후에 샤인과 저녁을 먹으며 여성들의 욕망을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아시아 여성들은 약자나 피해자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이젠 금지된 우리들의 황홀한 욕망이야기를 서치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