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여성마라톤 워킹크루 이벤트가 5월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궁 돌담길에서 열렸다. 사진 제공=위밋업스포츠
제22회 여성마라톤 워킹크루 이벤트가 5월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궁 돌담길에서 열렸다. 사진 제공=위밋업스포츠

도심을 10킬로미터씩 달리는 러닝대회는 출발 전부터 불만을 자아냈다. 보통 만 명 가까이 운집한 인파 속에서 소지품을 맡기고 대열을 찾아가는 건 그나마 괜찮았다. 행사가 시작되자 무대에 선 개그맨이 농담조로 여성을 조롱하고 인플루언서들이 등장해서 준비운동인지, 제품 홍보인지 모를 몸짓을 선보였다. 쉴 틈 없이 반복되는 후크송이 두통을 유발하기 시작할 때쯤 드디어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마음이 급한 참가자 몇몇이 우르르 넘어졌다. ‘러닝 대회에 참가한 나’를 촬영하느라 좀처럼 속력을 내지 못하는 대열에서 스트레스가 치솟았다.

‘이럴 바엔 혼자 뛸 걸.’

기념 티셔츠, 메달, 심지어 연습 때보다 단축된 기록도 굳은 결심을 바꾸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2년 넘게 고립이 곧 안전인 시대에 살아보고 알았다. 나에게도 무리 짓고자 하는 본능이 있고 그게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는 걸. 지금까지는 모임과 혼자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으면 높은 확률로 혼자를 선택하곤 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서 선택지가 숫제 사라지고 고독이 아닌 고립을 강요당하자 당혹스러웠다. 내가 혼자를 선택할 수 없다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독과 지루함을 견디며 안전해질 날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고립을 견디다 못해 지쳐버린 지 오래인데도 안전은 요원하기만 했다. ‘다음에 만나서 운동이나 하자’며 친구들과 나누던 인사는 허공에 흩어졌다. 어쩔 수 없이 혼자서라도 운동은 해야겠고 슬그머니 러닝에 관심이 쏠렸다. 기약 없는 팬데믹 사태에 가장 고독한, 그래서 안전한 운동을 불러들였다. 일이 년 사이에 팬데믹을 계기로 달리기 시작한 사람이 꽤 많았다.

달려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팔다리, 폐, 심장은 바빠도 뇌는 크게 할 일이 없다. 자연히 달리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인간은 왜 모이는 걸까? 모여서 무엇을 함께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강요된 고독이 얼치기 사색가를 낳았다. 예전처럼 단순하게, ‘사람 많은 곳이 싫다’고 일갈하기에는 참가자 만 명의 의미를 되짚을 필요가 있었다.

그때 우리는 순전히 모였다는 이유 하나로 유능해졌다. 개개인은 볼품없고 무능력할지라도 군중이 모이면 없던 길도 만들 수 있다. 평소에 길이 아닌 곳도 만 명이 한꺼번에 달리면 길이 된다. 바라보기만 해도 아찔한 한강대교와 8차선 차도를 우회하지도, 멈추지도 않고 달렸다. 그것은 오직 모임으로써 발휘되는 힘이었고 다른 무엇으로도 그 힘을 대체할 수 없었다.

혼잡하고 무질서하고 때로는 위험이 도사릴지라도 대규모 군중이 한 자리에 모이는 현상과 모이고자 하는 욕구도 소중한 일상의 일부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비용과 시간을 지불한다고 언제든 모일 수 있는 게 아니다. 팬데믹을 겪고서야 당연한 일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팬데믹의 공포도 잦아들고 어느덧 엔데믹 시대를 맞았다. 혼자 달려도 좋지만 여러 사람과 길을 만드는 경험도 해보길 권한다. 지금 허락된 일상도 이 순간이 아니면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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