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상드 탄생 200주년을 맞아

“우리는 혁명적이어야 하지만 성급히 폭력에 호소하기보다는

인내심과 끈기를 가지고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

시대를 반역한 여자

역사에는 시대를 앞당겨 사는 사람들이 있다. 200년 전 7월 2일 태어난 조르주 상드(1804∼1876)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상드는 19세기에 이미 21세기를 산 여성이다. 자기 시대가 부여한 여성이 가야 할 길을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만들어간 여자, 결코 사랑할 수 없는 부도덕한 남편과의 삶을 참을 수 없어 법으로 금지된 이혼을 감행한 여자, 젊은 시인 알프레드 뮈세와 사랑에 빠지고 당대의 젊은 음악가 쇼팽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 여자, 오로르 뒤펭이라는 원래의 이름을 버리고 조르주 상드라는 남자 이름을 필명으로 삼아 무려 90권의 소설을 쓰면서 자신의 경제적 독립을 유지한 여자, 남장을 하고서 궐련을 피며 여자들에게 금지된 장소를 자유롭게 드나들던 여자, 1848년 민중의 편에 서서 공화국을 지지한 여자, 발자크·위고·플로베르·테오필 고티에·들라크루아 등 당대의 프랑스 지성들 그리고 마치니·가리발디·투르게네프·바쿠닌 등 이탈리아와 러시아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여자, 어느 날 파리를 떠나 시골에 잠적한 여자, 과일 잼을 잘 만들고 숲 속을 산책하기를 즐기던 여자, 아이들과 손자들과 식물을 지극히 사랑한 여자, 농촌 사람들을 보살피며 그들과 잘 어울려 지냈기 때문에 '노앙의 착한 부인'으로 불렸던 여자.

상드는 그런 여자였다.

프랑스 여성계 “상드를 팡테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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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드는 1804년 프랑스 혁명 직후 나폴레옹 치하에 태어났다. 올해 프랑스에서는 그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수많은 행사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 가운데 상드의 유해를 팡테옹으로 옮기는 사업이 추진되었다.

◀파리 룩상부르그 공원에 있는 상드의 동상.

루소와 볼테르, 빅토르 위고와 장 조레스 등 조국을 위해 헌신한 프랑스 공화국의 상징 인물들의 유해가 안치된 팡테옹에 왜 아직까지 여성은 한 명도 없느냐는 질문이 제기되면서 프랑스 여성계는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상드의 유해를 팡테옹으로 이전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상드에 대한 오래된 선입견을 가진 남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계 내부의 의견 대립과 현재 상드의 유해가 묻힌 노앙 지방 사람들의 반대로 유해 이전 사업은 보류되었다.

상드가 여성해방의 선구자이고 1848년 공화국을 위해 싸웠으며 무엇보다 누구 못지않은 문학적 유산을 남겼으므로 팡테옹에 들어갈 첫번째 여성이라는 주장이 상드 유해의 팡테옹 이전에 힘을 실어준다. 반면 상드가 19세기 여성운동사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참정권 운동에 반대했고, 1848년 당시 '여성의 소리'로 대표되는 여성운동가들이 상드를 여성 대표로 내세워 국회에 보내려는 시도를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수락하지 않았으며 1870년 파리 코뮌에 대해서도 부정적 입장을 취했으므로 팡테옹에 들어가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비판적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가정 내 남녀평등 위해 참정권보다 민법개정 우선

상드의 정치 및 사회참여에 대한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 상드의 동상이 서 있는 파리 5구 뤽상부르그 공원 부근에 살고 있는 역사학자 미셸 페로의 집을 방문했다. 프랑스 여성사 연구의 어머니이며 사생활의 역사를 개척한 미셸 페로는 <조르주 상드: 정치와 논쟁(1843∼1850)>이라는 제목으로 상드가 자신의 정치에 대한 생각을 피력한 글들을 편집하고 해설하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미셸 페로에 따르면, 상드는 여성이 결혼과 가족 생활에서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한 미성년자 취급을 당하고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일차적 과제로 생각한 것이지 여성의 참정권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여성을 거의 노예상태로 가둔 민법 개정이 참정권 확보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상드는 1804년 자신이 태어난 해에 만들어진 여성억압적 나폴레옹 민법에 대항해서 싸운 것이다.

미셸 페로는 이어서 1870년 파리 코뮌 당시 상드가 비판적 입장을 취한 것은 사회개혁의 방법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상드는 언제나 평등을 주장했고 그런 방향으로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테러에 호소하는 개혁의 방법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하는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상드는 “우리는 혁명적이어야 하지만 성급히 폭력에 호소하기보다는 인내심과 끈기를 갖고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 사회주의는 목표요 공화국은 그것을 이루는 수단이다”라고 말했다. 1876년 세상을 떠나기 2주일 전에 상드는 “나의 가슴은 언제나 붉은 색이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내 가슴은 언제나 붉은색이었다”

상드는 귀족 출신 아버지와 평민 출신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프랑스 혁명의 딸이다. 차별적 신분제를 가로질러 평민 여성과 결혼한 아버지는 혁명을 지지하던 개명한 귀족 출신의 장군이었다. 프랑스혁명이 있었기에 귀족과 평민이 결합했고 그 사이에서 상드가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상드는 프랑스혁명의 딸이고 사회적 신분의 혼합물이다.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상드는 귀족 문화를 전수하려는 할머니와 자유분방한 평민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항상 우아하고 올바른 자세와 말하는 법을 강조한 반면, 어머니는 자기의 욕구를 거침없이 표현하는 자유로운 태도를 보여주었다. 상드는 그 두 개의 상반된 요구 사이에서 찢기워진 채 성장기를 보냈다. 실험과 모험은 언제나 이질적인 것 사이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상드의 창조적 삶은 할머니와 어머니, 다시 말해서 귀족과 평민의 삶을 종합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문·편견에 가려 있던 진면목 재조명 작업 활발

상드는 자기가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하고 살았다. 그녀는 자신의 삶의 주체였다. 그러나 상드는 그런 자유를 누리기 위한 비싼 값을 치렀다.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그녀에 대한 온갖 추문과 선입견이 그것이다.

보들레르는 “상드는 남자들의 화장실이었다”는 성적 비하 발언을 했고, 니체는 “상드는 암소가 우유를 만들듯 글을 쏟아냈다”는 발언으로 상드의 문학 세계를 깎아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상드 탄생 200주년을 맞이해 상드에 대한 근거 없는 헛소문의 실체가 밝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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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통에 달하는 상드의 서간문이 27권의 책으로 출판되고 그녀의 자서전 <내 삶의 이야기>가 새롭게 감수되어 출판되었다. 뿐만 아니라 <검은 도시> 등 절판된 여러 소설들이 다시 나오면서 상드에 대한 심층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소문과 편견에 가려진 상드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다.

▲문학잡지 <마가진 리테레르>의 조르주 상드 특집호 표지.

벌써 1990년대 이후 프랑스와 미국을 거쳐 일본에 이르기까지 상드 연구가 붐을 이루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한국에는 그녀의 삶을 알기 위해 꼭 읽어야 할 <내 삶의 이야기>도 번역되지 않는 상태다. 그저 쇼팽과 도피행각을 벌인 연애소설 작가로 알려진 상드의 삶과 문학 세계를 재조명하는 작업은 시대를 앞서 살았던 19세기 한 프랑스 여성의 주체적 삶이 한국에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여성들에게 던져주는 의미를 묻는 작업이 될 것이다.

장미란 파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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