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화물연대 집단 운송거부 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화물연대 집단 운송거부 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

군대, 국방, 외교 분야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안보(安保)’다. 북한이 미사일이나 방사포를 쏘면 가장 먼저 소집되는 것은 국가안보실 주재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이다. 21세기 정치학대사전(네이버 검색,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발간)에는 안보를 ‘일반적으로는 국가의 영토보전과 독립을 외국의 침략 등의 위협에 대해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뉴스와 사전의 정의를 막연하게 종합하자면, 보통 안보란 우리나라의 영토를 위협하는 침략행위, 그러니까 군사적 위협에 대해 국가를 방어하고 보호하는 것 정도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뉴스에서는 이런 단어들도 종종 보인다.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FAO)가 북한을 외부 식량지원이 필요한 국가 중 하나로 재지정하면서 식량 안보 상황이 여전히 취약하다고 평가했다(뉴시스, 2022.12.4. 보도)’, ‘능동적 경제안보 외교를 추진해 나감에 있어 우리 국민을 비롯한 경제 안보 관련 국내외 전문가와의 쌍방향적 소통을 강화(뉴스원, 2022.12.2. 보도)’ 같은, 군사적 위협이나 침략행위 이외에도 안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안보란 무엇일까? 안보, 안전보장은 영단어 security의 번역어다. security는 라틴어 securitas에서 비롯돼 있다고 알려져 있다. Se(벗어나다)와 Curitas(불안, 공포)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서, securitas는 ‘공포로부터 벗어나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security, 안전보장은 안전(safe)보다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의 의미가 추가되어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단어의 어원과 해석에 초점을 맞춘다면, 안전보장은 ‘안전하기 위한 일련의 행동’으로 다시 정리할 수 있다.

안보라는 단어는 언뜻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으로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근대국가의 탄생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같은 정치이념 혹은 민족 단위로 묶인 집단이 지켜야 할 영토와 경계가 생겨나면서 자연스럽게 안보는 외세로부터 내부를 지켜내는 집단, ‘국가’의 과업으로 정의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UN 체제의 출범, 냉전시대를 거치며 세력 간 경쟁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개별국가와 집단이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대한 방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 과정을 통해 어느 순간 안보는, 원초적인 의미의 ‘안전하기 위한 행동들’에서 ‘국가 간 경쟁에서 국가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 능력’으로, 국가 중심의 정치 외교적 단어로 굳어져 버렸다. 특히 상대 세력의 절멸을 노렸던 전쟁이 어떤 방식으로든 종결되지 못하고 오랜 기간 대치하게 된 상황에 놓여있는 우리에게, 안보는 국가의 위기관리와 군사전략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강조되기 시작했고, 이는 곧 국가를 위시한 조직적 폭력과 이데올로기 탄압의 구실로 작용했다. 긴 시간을 거치며 우리 사회에서 안보는 곧 국가 생존을 위해 감히 침범되지 못하는 신성한 영역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됐다.

한편 안보는 탈냉전 시기 새로운 국면을 만나며 그 의미가 확대되는 기회를 맞는다. 국가와 국가가 진영을 두고 서로를 경계하고 종말의 부담을 안을 필요가 없는 시대에, 인간안보(human security)의 개념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1994 유엔개발계획(UNDP)에서 발표한 유엔개발보고서엔 인간안보의 요소로 경제·식량·보건·환경·개인 등 7가지를 안보의 요소로 꼽으며 기존의 군사 중심 안보 개념에서 보다 ‘보편적이고, 상호의존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안보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강조했다. 한 나라의 안보와 평화수준을 평가하는 척도에 안전, 분쟁, 군사화 등 이외에 국가 투명성, 법치의 정도, 자원분배의 평등, 정보의 자유, 권리 평등, 의료 수준과 복지 정도를 측정하는 적극적 평화지수(positive peeace)가 반영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다시 원래의 안보라는 단어가 함의했던 영역까지 확대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안보의 패러다임 확장은 다시 ‘안보’ 문제에서 막다른 골목을 만날 수밖에 없게 된다. 국가중심 전체주의적 가치의 안보에서 개개인의 자유 실현으로의 안보 의미의 전환은, 결국 개인이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적 가치가 위협받게 되었을 때 어느 선까지 용납할 수 있는가, 구성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개인의 영역을 어디까지를 국가가 침범할 수 있는가와 같은, 기존 안보라는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국민국가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국가의 기능이 복잡해지고 확대될수록, 인간안보에 대한 수요가 커질수록, 국가와 개인은 일종의 ‘안보게임’ 속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권리와 분배와 평등을 보장받기 위해, 국가는 사회보장제도의 확충과 각종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국가는 우리의 안보를 보장해줌과 동시에 다시 통제하는 역할을 강하게 갖게 되는 것이다.

안보의 확대와 더불어 국가 역할 또한 확대된 ‘안보 사회’ 속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질문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가장 근원적인 안보의 목적, 우리는 과연 안전한가에 대한 의심이다. 반드시 보장받아야 할 것들이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정된 자원 속에서 분배되는 안보의 파이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적절히 분배되고 있는지와 같은 끊임없는 점검의 질문 말이다. 사회가 혼란스럽거나 어떤 정치적 기회들이 포착되었을 때, 위정자들이 매번 소환하는 ‘안보’ 외침 속에서 진짜로 우리는 안전한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실 인근 골목에서 150명이 넘는 사람들이 통제도 없이 짓눌렸을 때, 복지제도의 사각에서 일가족이 외로이 숨져갈 때, 한숨도 자지 못한 대형 트럭들이 화물과 위험물을 가득 안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는데 “화물연대 파업은 북핵 위협과 마찬가지”라는 말이 나올 때, 교묘히 섞인 국가안보의 메시지 속에서 ‘진짜 안보’에 대한 우리의 의심은 여기를 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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