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로 사립 공공도서관 건립한 김인정 여사

1930년 7월 23일 자 중외일보에는 ‘총비 8만 원으로 평양에 대도서관’이라는 헤드라인 아래 ‘10여만 평양 부민을 위하여-김인정(金仁貞) 여사의 장학’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1930년 7월 23일 자 중외일보에는 ‘총비 8만 원으로 평양에 대도서관’이라는 헤드라인 아래 ‘10여만 평양 부민을 위하여-김인정(金仁貞) 여사의 장학’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사진=유희인 작가 제공

1930년 7월 23일 자 중외일보에는 ‘총비 8만 원으로 평양에 대도서관’이라는 헤드라인 아래 ‘10여만 평양 부민을 위하여-김인정(金仁貞) 여사의 장학’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평양부내 아청리 98번지에 거주하는 김인정 여사(60)는 8만여 원의 거대한 금액을 제공하여 평양 부민 전체를 위한 사업의 하나로 연평 2백 평의 연와 2층의 굉장한 도서관을 설립하기로 결정되어 평양 부내 창전리에 소재한 대지 6백여 평을 매수한 후 근일 건축공사에 착수하리라는데 여사의 큰 사업에 대하여서는 평양 부민 전체가 입을 모아 칭찬하여 마지않는 터’라고 하는 기사를 필두로 ‘자선의 여신 김인정 여사-십만 원 사재를 기증, 평양에 도서관 건설(1930년 9월 13일 자 매일신보)’이라는 제하의 기사에는 ‘종래에도 자선사업에는 팔을 걷고 나서 재산을 아끼지 않고 찬조에 힘을 쓴 사력이 비일비재로 현재 평양고아원도 금일을 보게 된 것은 전혀 이 여사의 은공이라 한다. 이외에도 강원도 동흥학교에 천 원, 평양숭인상업학교에 이천 원을 기증한 일이 있다.’는 내용이 실렸다. 십만 원은 당시 기준으로 경성에 집을 백 채 정도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도서관 설립은 나의 사회사업의 첫걸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올시다. 나에게는 아직 남은 사업이 많습니다. 우선 평양에 조선 사람을 본위(本位)로 한 신문기관도 하나 설립하고 싶고 무산자의 무료치료병원과 실업학교 하나도 설립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그만한 물질의 실력이 없으니 오직 가슴만 답답할 뿐입니다. 하나 사회에서 반드시 이러한 사업에 착안하실 분이 나올 것이라고 믿습니다.”(1930년 7월 24일 자 조선일보)

김인정 여사가 1930년 평양에 건립한 인정도서관. 중앙에 있는 여성이 김인정 여사다. ⓒ국립중앙도서관
김인정 여사가 1930년 평양에 건립한 인정도서관. 중앙에 있는 여성이 김인정 여사다. 사진=유희인 작가 제공

도서관 설립을 앞두고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김인정 여사의 포부와 기상은 웅대하기 그지없다.

김인정 여사는 1871년에 평양에서 태어났다. 여사에게는 자손이 없었으나 언니의 아들인 오경숙(吳敬淑)이 아들 못지않게 여사를 섬겼고 든든한 의논 상대가 되어 주었다. 오경숙은 1925년 흥사단(興士團)에 입단한 이래 평생 흥사단 단우(團友)로 지냈으며 일제가 우리나라의 양심적 지식인을 협박하고 회유하기 위하여 1937년에 벌인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 때는 옥고(獄苦)를 겪었다. 고당 조만식(古堂 曺晩植) 선생과 뜻을 같이하여 일제강점기에 교육활동과 조선물산장려운동에 헌신하였고 김인정 여사에게 사회봉사에 대한 의지가 있음을 알게 되자 고당을 소개하여 여사가 도서관을 설립하고 경영하는 데에 고당의 조언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해 주었다. 오경숙과 고당은 재단법인 인정도서관의 이사로도 참여하였다.

재단의 재산은 강서군 강서면 정화리(江西郡 江西面 靜和里)의 약수들(藥水地)에 있는 논(畓) 십만 평, 대동군 고평면 문발리(大同郡 古平面 文發里)의 개간답(開墾畓) 사만 평, 평양 시내 신양리(新陽里)에 있는 임대가옥(賃貸家屋) 이십 채, 그리고 도서관 건물을 합한 것으로서 거기서 나오는 추수와 집세로 도서관 운영경비를 충당하였다. 당시의 평양부 조례(平壤府 條例)에 따르면 도서관과 같은 공공기관은 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여러 차례 교섭하였으나 조선인 기관에 대한 차별대우 때문에 끝내 보조금을 받지는 못하였다.

매일신보 1930년 9월 30일자
매일신보 1930년 9월 13일자

그녀는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기니 무엇이니 할 것 없이 거저 조선 사람은 아무라도 좀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나왔지요. 이 일을 시작하여 놓고 보매 여러분이 다 좋은 사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 나도 매우 기쁩니다. 그러나 돈이 많지 않아 좀 더 큰 사업을 하지 못함이 사회에 대하여 미안합니다.”

1931년 12월 3일 인정도서관(仁貞圖書館) 개관식이 거행되었는데 김인정 여사의 환갑 기념을 겸하는 그 자리에는 도지사를 비롯하여 도청 간부, 기타 관민 유지 3백여 명이 참석하였다. 일반열람실, 부인열람실, 특별열람실, 신문열람실, 아동열람실, 신문열람실에 연구실까지 갖추고 5천여 권의 장서를 소장한 상당히 큰 규모의 공공도서관이었다.

이 도서관의 수용인원은 200명이었으나 개관 후 일주일 동안의 이용자가 1600명 남짓으로 매일 만원이 되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한 이가 하루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용자의 95%는 학생이었는데 입관자의 폭주로 학생 참고서류가 부족하여 추가로 1000여 권을 주문하였다.

한여름 더울 때만 2주 휴관했을 뿐 연중무휴로 개관하였는데 1932년 2월부터는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로 개관 시간을 연장하였다. 개관 후 1년 동안의 도서관 이용자 수는 약 4만 7000명이었고, 열람 책 수는 8만 권이 넘었다.

1935년에는 아동도서실을 증설하여 4월 6일부터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게 하였는데 조선중앙일보는 ‘아동에게 대복음(大福音)’이라는 제목으로 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1937년 9월에는 도서관 옆에 연와조 3층 건물을 준공하여 3층에는 5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 2층에는 향토문화실과 아동실을 배치하고 아래층은 일반열람자를 위한 오락실로 사용하였다.

개관 5주년 때에는 장대현교회의 채필근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여 창립 5주년 기념 강연회를 열었고 개관 10주년 때에는 김인정 여사의 기부로 설립된 인정여자간이학교(仁貞女子簡易學校) 학생 대표가 축하의 말을 한 데 이어 고희를 맞은 김 여사의 감사 인사가 있었고 당일 오후에는 도서관 3층 강당에서 강연회와 음악회를 열었다는 신문 기사가 남아있다. (1941년 12월 5일 자 매일신보) 인정도서관의 소장 도서는 4만 권으로 늘어났고 당시 많은 인재가 열람하였는데, 일제는 이 도서관을 약탈하고자 불온서적이라는 이유로 일부 장서를 빼앗아 가고 평양부립도서관에 넘기도록 종용했으며, 일제 말기에는 통제경제를 한다는 구실로 경도 재벌에 강매시켰다. 해방 이후 소련이 북한지역을 점령하면서 도서관 건물이 소련군 문화사령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김인정 여사는 해방 이후 9.28 수복 후 국군이 평양에 입성할 때까지 있다가 1.4 후퇴 때 중화까지 내려와 객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인정 여사는 일찍 부모를 잃었는데 제도교육을 많이 받은 것은 아니지만 명석하고 이재에 밝아 많은 돈을 모았다.

1931년 12월 7일 자 동아일보 사설은 ‘조선도서관운동의 봉화’라는 제목으로 김인정 여사는 ‘비애로 가득 찬 일생에 입립신고(粒粒辛苦)로 모은 재산의 거액을 떼어 평양 시민을 위하여 도서관을 기증’한 것이며 ‘평양 시민 김인정 여사의 기부에 대하여 영원히 감사할 의무가 있거니와 그 의무의 수행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다시 돈을 모아 이 김인정도서관을 완비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중략) 도서관은 문화보급에 있어서 학교와 병견(竝肩)할 중요성을 가진 것이다. 김인정 여사의 이 애국적 영웅적 사업이 반드시 전 조선의 재산가를 자극하여 도서관 건설 운동이 각지에 일어나기를 아니 바랄 수 없다.’고 말한다.

김인정 여사는 평양고아원과 평양양로원을 비롯하여 평양, 강원도, 간도 용정 등의 여러 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위해 현금이나 토지를 기부하고 작황이 나쁠 때는 과감히 소작료를 면제해주는 것은 물론 소작인 구제 사업을 벌였다. 1934년 5월 5일 자 조선일보에는 “여사는 금년 64세의 고령이나 아직도 원기가 왕성하여 슬하에 일점혈육이 없으나 불쌍한 아이들을 자택에 모아서 양육하는 것으로써 낙을 삼아 이미 그 수효가 사오십 명에 달한다 하며 세상에 내어놓은 사업보다도 아무도 모르는 동안에 좋은 일을 하는 일이 더욱 많다고 한다.”는 기사가 실린 것이나 소작인들에게 너그러웠다는 기록을 보면 드러내지 않은 선행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인정 여사는 평소에 “재산은 가치 있게 써야 그 재산이 가치 있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재산은 없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여사의 기부 활동을 두고 자손도 없고 쓸 곳이 없어서 사회사업에 쓰는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으나 여사는 “만약 나에게 자손이 있었다 할지라도 상속은 해주지 않을 것이다. 자손에게 상속하여 주는 것은 결국 자식 버리고 돈 버리는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평양 시민들이 수해를 겪거나 화재가 나서 이재민이 생기면 이들을 위하여 거금을 쾌척하고 일제 치하의 우리 민족에게 소망은 ‘배움’에 있다고 믿고 인재 육성을 지원했던 김인정 여사의 나라 사랑 민족 사랑의 고귀한 뜻에 고개가 절로 숙어진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