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소송 중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뉴시스·여성신문
이혼 소송 중인 노소영(왼쪽)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뉴시스·여성신문

얼마 전에 아내가 자기에게 가사노동의 대가로 월급을 몇백만원씩 달라고 했다. 돈 없어서 못 준다며 웃음으로 받아넘겼지만, 실제로 아내가 그만한 경제적 가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투병을 한 이후로 밖에서 좋지않은 음식을 먹고 다닐까봐 한두 끼는 꼭 챙겨주곤 한다. 큰 딸은 재택근무가 잦아서, 작은 딸은 종강을 한지라 ‘삼식(三食)이’는 아니어도 ‘이식(二食)이’들은 되고 있다. 집안 청소, 세탁기 돌리기, 철 지난 옷들 세탁소 보내기…. 아내에게는 집안 일들이 그치지 않는다. 전에는 나도 가사일을 제법 나누어서 했는데, 투병 이후 내 몸 관리에 신경쓰며 일하다 보니 어느 사이에 아내 혼자 집안 일들을 많이 껴안게 되었다.

굳이 최근 상황만이 아니라, 결혼생활을 30년 넘게 해오면서 아내는 가정을 일구는데 큰 역할을 했다. 함께 살아오면서 중요한 고비에서의 판단들은 물론이고 자식들을 이만큼 키우는데 나보다 아내의 역할이 훨씬 컸다. 사이가 나쁜 부부가 아니니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혹여라도 재산분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아내가 나보다 1%라도 더 갖는게 옳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노소영·최태원 이혼, 재산분할 665억
기업 성장에 배우자의 기여 인정 안해

그런데 최근 있었던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1심 판결의 결과가 눈길을 끈다. 노 관장은 최 회장이 보유한 지주사 SK㈜ 주식 50%를 재산분할 대상으로 요구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노소영씨가 SK 주식 형성과 유지, 가치 상승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최 회장이 위자료로 1억원, 재산분할로 665억원만 지급하라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665억원도 어마어마한 돈이지만, 남편이 기업을 성장시킨데 대한 배우자의 기여를 인정하지 않은 점은 논쟁거리가 될만 하다. 당장 노 관장은 “1심 판결로 인해 앞으로 기업을 가진 남편은 가정을 지킨 배우자를 헐값에 쫓아내는 것이 가능해졌다”며 “여성의 역할과 가정의 가치가 전면 부인됐다”고 반발했다. 

알다시피 두 사람의 이혼은 지난 2015년 최 회장이 스스로 “혼외자가 있다”고 털어놓으며 노 관장을 상대로 이혼 절차에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 “34년의 결혼 생활 동안 아이 셋을 낳아 키우고, 남편을 안팎으로 내조하면서 그 사업을 현재의 규모로 일구는데 기여한 것이 1.2%라고 평가받은 순간, 그동안 저의 삶의 가치가 완전히 외면당한 것 같았다”는 것이 노 관장의 항변이다. 개인들 간의 이혼과 재산분할 문제에 대해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은 물론 아니다. 다만 아무리 증여받아 출발한 ‘특유 재산’이었다고 해도, 그 재산을 키우는 과정에서 배우자의 기여를 단 1%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온당한가 하는 문제는 남는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 『얼어붙은 여자』에는 여성들의 인내를 요구하는 결혼 생활에 대한 짙은 회의가 기록되어 있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 『얼어붙은 여자』에는 여성들의 인내를 요구하는 결혼 생활에 대한 짙은 회의가 기록되어 있다. ⓒ레모

결혼 생활에 익숙해져 ‘얼어붙은 여자’
되어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이 있다

대개의 부부생활에서 특히 여자들의 기여는 남자들의 눈에 띄지 않게 녹아들어가 있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 『얼어붙은 여자』에는 여성들의 인내를 요구하는 결혼 생활에 대한 짙은 회의가 기록되어 있다. “왜 둘 중에서 나만 이것저것 해봐야 하나, 닭은 얼마나 오랫동안 삶아야 하는지, 오이의 씨는 제거해야 하는지, 그런 걸 알아보려고 왜 나만 요리책을 탐독해야 하고, 그가 헌법을 공부하는 동안 당근 껍질을 벗기고, 저녁을 먹은 대가로 설거지를 해야 하는가? 어떤 우월성의 명목으로 이런 일이 가능한가?” 결혼한 여성들의 공로는 그렇게 가려지고 숨겨져 있다. 에르노의 문장들은 예리한 칼날이 되어 그나마 염치있는 남자들의 가슴을 찌른다. “두렵고, 허둥지둥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여성의 인내심, 그들은 그것을 애정이라 부른다.”

그런 결혼생활에 익숙해져서 마침내 ‘얼어붙은 여자’가 되어버린 에르노의 체념적 고백은 우리 사회 여성 대부분의 삶과 닮아있다. 물론 재벌가의 부인이었던 노 관장이 당근 껍질을 벗기고 설거지를 하는 수고를 얼마나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와는 상관없는 재벌가 사람들 끼리의 이혼 소송일 뿐이라고 넘길 일은 아니다. 이런 판결 앞에서 진짜 절박한 것은, 특별히 가진 것도 없이 ‘얼어붙은 여자’가 되어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본질이다. 

유창선 시사평론가  사진=홍수형 기자
유창선 시사평론가 사진=홍수형 기자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