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퀴어 예술가 테일러 맥 작품
‘정상성’ 벗어던진 인물들 통해
가부장제의 억압적 구조 비판
무지·혐오·학습된 폭력성 까발려
국내 초연...29일까지 더줌아트센터

*이 리뷰에는 작품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연극 ‘히어(HIR)’의 한 장면. ⓒ황선하/더줌아트센터 제공
연극 ‘히어(HIR)’의 한 장면. ⓒ황선하/더줌아트센터 제공

아내를 때리는 남편 이야기는 흔하다. 남편을 ‘패는’ 아내는 드물다. 연극 ‘히어(HIR)’는 여성에겐 피해자의 자리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편견을 뒤엎으며 출발한다. ‘정상성’을 벗어던진 인물들을 통해 낡은 인식과 관습, 개개인을 교묘하게 억압하는 구조를 비꼰다. 우리의 일상이 젠더정치의 연속임을 보여주는 솜씨가 짜릿하다. 몇몇 장면에선 누구나 저항 없이 웃게 되는 훌륭한 블랙코미디다.

미국 퀴어 예술가 테일러 맥의 작품으로 이번이 국내 초연이다. 미국의 한 가정집이 배경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파병됐던 아들 아이작(홍선우 분)이 3년 만에 집에 돌아왔다. 그를 맞이하는 것은 쓰레기장처럼 변한 집이다. 이 모든 변화에 앞장서는 어머니 페이지(박명신 분), 무지개색 가발에 나이트가운을 입고 광대처럼 화장한 아버지 아놀드(김수현 분),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을 한 동생 맥스(김하람 분)를 보며 아이작은 말 그대로 구토한다. 

러닝타임 120분 동안 지루할 틈이 없다. 예측불허의 전개, 배우들의 밀도 있는 연기가 관객을 사로잡는다. ‘보통의 중산층 가정’이라는 얇은 껍질이 깨지면서 쉬쉬하고 무시하고 타협해온 문제들이 민낯을 드러낸다. 아버지와 아들이 ‘정상’이라고 믿었던 가족의 모습이 어떤 폐허를 딛고 만들어졌는지 보여준다. 무지와 혐오, 학습된 폭력성을 파고들어 질문을 던지는 솜씨가 기발하고 신선하다.

연극 ‘히어(HIR)’의 한 장면. ⓒ황선하/더줌아트센터 제공
연극 ‘히어(HIR)’의 한 장면. ⓒ황선하/더줌아트센터 제공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편의 ‘때릴 권리’는 오랫동안 ‘남성의 역할 수행’으로 여겨졌다. 한국은 특히나 남성이 여성에게 휘두르는 폭력과 통제가 자연스러운 사회다. 그런 의미에서 극 중 아버지 아놀드는 ‘한남’의 원형에 가깝다. “아내가 말이 많아서, 동네 강아지가 짖어서, 비싸게 팔려고 산 주택이 통 팔리질 않아서” 툭하면 버럭 화를 내고 아내와 아이들을 패던 작자다. 아내 보란 듯이 외도하고, 아내에게 성관계를 강요하고, 아들이 훔쳐보는 걸 알면서도 전 애인들의 나체 사진을 집에 보관하는 남자다. 그에게 가족은 자신이 통제하고 단죄할 수 있는 소유물이지 욕망과 고통을 느끼는 한 인간이 아니다.

어느 날 아놀드는 33년간 일한 직장에서 중국계 미국인 여성에게 밀려나 실직하고, 분노와 충격에 뇌졸중을 겪는다. 남편 대신 비영리재단에 취직한 페이지는 퀴어 이론을 접하고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다. “인류는 남자의 갈비뼈에서 나온 게 아니라 트랜스젠더 물고기야. 엄마도 아빠가, 아빠도 엄마가 될 수 있어.”

신체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약자가 된 남편은 더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피해자의 반격이 시작된다. 집안의 대장이 된 여자는 이제 자신을 학대하던 남자를 비웃고, 가사노동을 시키고, 남자가 폭력적인 언행을 하면 물을 뿌리거나 엉덩이를 때리고, 반항을 막겠다며 여성호르몬 에스트로겐을 먹인다. 몇몇 장면이 불편하다는 듯 헛기침하거나 한숨을 쉬는 관객들도 있었으나, “엄마가 아버지를 거세하고 있다”는 아들의 절규에 “너 그게 보이는구나” 미소로 응수하는 여자에게 은밀한 쾌감을 느낀 관객도 많았을 것이다.

영화 ‘모가디슈’, 드라마 ‘불가살’, ‘괴물’ 등에 출연했던 박명신 배우의 열연이 극 전체에 짜릿한 재미와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는 “‘히어’는 너무 낯익어서 낯선 연극”이라며 “이렇게까지 상상도 이해도 안 되는 인물(페이지)은 처음이었다. 형상화하는 과정 중에 낯익은 인물이란 것을 알았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또 “아놀드를 부정하지만 페이지는 또 다른 아놀드다. 아놀드와 마찬가지로 아이작과 맥스를 자기 휘하에 두려고 하지만 자식들을 내치는 꼴이 된다”고 밝혔다.

연극 ‘히어(HIR)’의 한 장면. ⓒ황선하/더줌아트센터 제공
연극 ‘히어(HIR)’의 한 장면. ⓒ황선하/더줌아트센터 제공

테스토스테론을 맞고 FTM 트랜스젠더가 된 둘째 맥스(맥신)는 이 작품이 지금, 여기의 현실과 얼마나 닮았는지 상기시키는 존재다. 이 당찬 10대는 자신을 ‘그’나 ‘그녀’가 아닌 새로운 주어 ‘지’(Ze), 인칭대명사 ‘히어’(Hir)로 부르라고 말한다. 엄마 페이지와 함께 퀴어 이론을 관객들이 알기 쉽게 설명하기도 한다. 규범 바깥의 존재들을 포용하지 않는 정규 교육과정을 거부하고, 독립해 퀴어 공동체에서 살겠노라고, 역사에서 지워진 성소수자들을 연구하겠노라고 말한다. 우리 곁에서, 각자의 삶에서 치열하게 투쟁하는 퀴어들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다.

아들 아이작은 고작 3년 사이에 일어난 이 모든 변화를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 가부장의 지위를 잃은 아버지,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 선을 넘어버린 동생에 대한 복잡한 갈등을 ‘도리를 다하지 않는’ 어머니에게 전가할 뿐이다. 폭력을 택한 대가로 쫓겨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가부장제의 망령에 사로잡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들의 초라한 뒷모습을 닮았다.

연극 ‘히어(HIR)’의 한 장면. ⓒ황선하/더줌아트센터 제공
연극 ‘히어(HIR)’의 한 장면. ⓒ황선하/더줌아트센터 제공

‘히어’는 2014년 초연 이래 전 세계적으로 70개 이상의 프로덕션이 제작됐고 호주 시드니연극상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한국 공연은 LG아트센터 개관작이자 이날치 신작 ‘물 밑’을 연출한 극단 풍경의 박정희가 연출을 맡았고, 아티스트 여신동이 시노그라피를, 작곡가 겸 사운드 디자이너 카입이 음악과 사운드를 맡았다. 김언 PD는 “더줌아트센터에서 새 작품을 올리기 위해 물색하던 중 테일러 맥을 발견했고, 실험적인 작품이 많은데 그중 대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판단해 선택했다”고 밝혔다. 오는 29일까지 서울 용산구 더줌아트센터. 예매 인터파크티켓, 문의 더줌아트센터 02-790-6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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