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범죄 피해자로부터 상담요청을 받았다. 질의사항의 요지는 대략 이런 거였다. 가해자 측의 회유와 겁박에 상당한 시간 동안 계속 시달리던 끝에 피해자는, 사실은 결코 원하지 않았지만 고소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합의서에 결국 억지로 서명을 하고 말았단다.

그러나 아무리 되풀이하여 생각해도, 본인이 끝끝내 침묵하게 된다면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게 될 것만 같아, 합의서에 이미 서명은 하였지만 이제라도 마음을 바꿔서 고소를 하고 싶은데, 고소를 하지 않겠다고 위와 같이 약속을 했는데도 고소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의외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사례다. 얼핏 보기로는 고소를 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더구나 학설상으로는 고소권자의 고소에 관한 권리포기가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 다수이기도 하다. 어떨까? 고소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문서로 남겼는데도 고소가 가능할까?

본래 우리 형사사법제도는 사인(私人)의 의사개입을 허용하지 아니하는 국가형벌독점주의를 기본 원칙으로 삼으면서, 일부 범죄에 한해서는 그 특수성을 감안하여 고소권자의 의사를 존중하여 형사소추 여부를 결정하게끔 예외를 두었다. 그러한 예외가 바로 친고죄와 반의사불벌죄다.

그런데 성폭력범죄는 지난 2013년의 법률개정으로 더 이상 친고죄, 즉 고소권자의 고소가 있어야 비로소 공소를 제기할 수 있는 범죄가 아니게 되었다. 예외에서 원칙으로 이행한 셈이다. 그렇기에 피해자의 고소가 없이도 수사와 공소제기가 얼마든지 가능하며, 심지어 피해자의 내심에 가해자의 처벌을 구하는 의사가 없더라도 최소한 이론상으로는 수사와 공소제기를 통한 국가형벌권의 발동이 가능하다. 게다가 비친고죄 유형의 일반 범죄에 있어서 피해자의 고소는 사건 수사의 실마리로서의 의미는 있으되, 형사소추를 위해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져야만 하는 요건이 아니다.

법원의 판례를 보자. 대법원은 "피해자의 고소권은 형사소송법상 부여된 권리로서 친고죄에 있어서는 고소의 존재는 공소의 제기를 유효하게 하는 것이며 공법상의 권리라고 할 것이므로, 그 권리의 성질상, 법이 특별히 명문으로 인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유처분을 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형사소송법은 고소취소에 관해서는 규정해 두고 있지만 고소권의 포기에 관해서는 아무런 규정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소 전에 고소권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고 판시하였다(대법원 1967. 5. 23. 선고 67도471 판결, 부산지방법원 2008. 4. 25. 선고 2007고합705 판결 등 참조).

한 단계 더 나아가 대법원은, 피해자가 고소장을 제출하여 처벌을 희망하는 의사를 분명히 표시한 후 고소를 취소한 바 없다면, 비록 고소를 하기 전에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 후에 한 피해자의 고소는 유효하다고 분명하게 판시한 바 있다(대법원 1993. 10. 22. 선고 93도1620 판결 등 참조). 즉, 고소를 하기도 전에 고소할 권리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제 결론에 다다랐다. 답은? 설사 원치 않는 합의서에 서명을 하였고, 이를 통해 고소를 하지 않겠다고 명시적으로 약속을 하였다고 한들, 그리고 심지어는 피해배상금조의 합의금까지도 받았다고 한들, 이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합의를 하면서 처벌을 원치 않으며 고소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적어주었더라도 고소권을 포기한다는 의사표시는 애초에 당연무효이니 피해자는 그에 무관하게 얼마든지 고소할 수 있다.

그러니 행여 가해자 측의 지속적인 회유를 이겨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지레 낙담하고 체념할 이유가 전혀 없다. 고소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강요당했더라도 그 사실이 국가형벌권의 발동을 가로막지 못한다. 꺾이지 않는 마음, 고소에 있어서도 어쩌면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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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성 변호사‧포항공대 상담센터 자문위원
박찬성 변호사‧포항공대 인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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