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 두 번 울리는 현 강간죄
드디어 개정 추진한다더니
법무부·여당 반대에 당일 입장 번복

222개 여성단체 즉각 반발
“오만·권한남용이 법치 넘어
국제협약 권고대로 비동의 강간죄 이행하라”

이기순 여성가족부 차관이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23∼2027년)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이기순 여성가족부 차관이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23∼2027년)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 또는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던 여성가족부가 9시간 만에 입장을 번복했다. 법무부와 여당 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말을 바꾼 것이다. 여성계는 즉각 반발했다.

여가부는 지난 26일 오전 ‘비동의 강간죄 도입 추진’이 포함된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23∼2027년)을 발표했다. 성폭력 피해자의 입을 막고 2차 피해를 일으켜 비판받아온 형법 제297조의 강간구성요건(폭행·협박)을 ‘동의 여부’로 개정을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여가부는 지난 26일 오전 ‘비동의 강간죄 도입 추진’이 포함된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23∼2027년)을 발표했다.  ⓒ여성가족부 배포 자료 캡처
여가부는 지난 26일 오전 ‘비동의 강간죄 도입 추진’이 포함된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23∼2027년)을 발표했다.  ⓒ여성가족부 배포 자료 캡처

그런데 법무부가 같은날 오후 “법무부는 ‘비동의간음죄’ 개정 계획이 없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법무부는 여가부에 “학계 등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고, 해외 입법례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포함하여 성폭력 범죄 처벌법 체계 전체에 대한 사회 각층의 충분한 논의를 거치는 등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반대 취지의 신중 검토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여가부는 약 9시간 만에 입장을 뒤집었다. 이날 저녁 “동 과제는 2015년 1차 양성평등기본계획부터 포함되어 논의되어 온 과제로서 윤석열 정부에서 새로이 검토되거나 추진되는 과제가 아니다”, “정부는 개정계획이 없음을 알려드린다”고 기자들에게 알렸다. 

여성단체들은 반발했다. 222개 여성단체로 구성된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는 27일 “양성평등기본계획 승인하고 뒤집은 법무부, 국제협약 권고대로 비동의 강간죄 이행하라”고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절차적으로도 이상하다. 비동의 강간죄가 포함된 제3차 양성평등기본계획은 법무부장관이 위원으로 소속된 양성평등위원회가 지난 26일 의결한 내용이다. 장관이 속한 위원회가 의결한 계획을 법무부가 같은 날 갑자기 부정한 것이다. “양성평등기본법은 성평등 국가책무를 담고 범 부처의 책무를 체계화한 법인데 법무부는 이를 무시하고 나선 것인가”는 지적(‘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이 나오는 이유다. 

여당의 압력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26일 SNS를 통해 비동의 강간죄 도입에 반대하며 “여가부 폐지 명분이 증명됐다”고 밝혔다. 이에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는 “법에 근거한 법치를 부인하면서 여당 의원이 부처 폐지를 다시 선동한 것이다. 오만과 권한남용이 법치를 넘고 있다. 이게 국가가 맞는가? 성평등을 책무로 하고 있는 국가인가?”라고 반문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단체 활동가들이 2019년 9월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앞에서 열린 강간죄구성요건의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단체 활동가들이 2019년 9월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앞에서 열린 강간죄구성요건의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비동의강간죄 도입 왜 필요한가
현행법, 피해자에게 폭행·협박 증명 요구

많은 성폭력 피해자가 수사·재판 과정에서 ‘폭행·협박의 증거를 보이라’는 압박을 받는다. ‘피해자의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할 정도에 이르는’ 폭행 또는 협박이 존재해야만, 형법상 강간죄와 유사강간죄를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강간죄 성립 요건을 매우 좁게 해석하는 ‘최협의(最狹義)설’ 때문이다. 이 조항은 1953년 첫 형법 제정 이래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여성계는 현행 강간죄가 성폭력 피해자의 입을 막고 2차 피해를 유발하므로 ‘가해자가 피해자의 적극적인 동의를 얻었는지’를 기준으로 삼자고 요구해왔다. 20대와 21대 국회에서도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죄 구성요건을 변경하는 개정안이 거듭 발의됐다. 법원도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2005년 경부터 폭행·협박 판단 기준을 완화한 판례가 다수 나오고 있다. 

비동의강간죄 도입하면 무고 증가? 통계적 억측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강간죄를 묻는다면 성폭력 무고가 늘어날 것’이라며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론 폭행·협박 증거 없이 피해를 신고했다는 이유로 동기를 의심받고 무고로 역고소당하는 피해자들이 많다. 통계를 봐도 억측에 가깝다. 2017~2018년 검찰의 성폭력 사건 처리 인원 7만1740명(중복 제외) 중 무고로 기소된 사례는 0.78%(556명), 유죄 선고는 0.42%(341명)뿐이다.

비동의 강간죄 도입은 국제적인 흐름이다. 유엔(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8년 한국 정부에 “성폭력 범죄의 정의를 ‘피해자의 자유로운 동의 없음’을 중심으로 개정”하라고 권고했다. 영국·독일·스웨덴·아일랜드·캐나다·스페인 등이 도입했고, 미국도 11개 주에서 적용하고 있다. 유엔 국제사법재판소와 유럽인권재판소도 비동의 강간을 처벌한다. 한국도 세계와 발맞춰 나아가야 할 때다. 

여가부의 이번 ‘정권 눈치보기’ 입장 번복이 더 유감스러운 이유다.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는 “시민들의 삶의 변화를 가로막고 있는 정부와 여당이 개탄스럽다”며 “성평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이 정부는 지극한 방해물”이라고 힐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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