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되어 다시 머리를 깎는다.

바리캉을 대기 전에 내 머리 여기저기를 쥐어보며 손가늠하는 것이 아내 나름의 매뉴얼이다. 자신감이 전해지는 그 손길에 나른한 졸음이 밀려오면 ‘아, 이게 행복이구나’ 그런 맥락 없는 혼잣말을 속으로 삼키곤 한다. 그런데,

“어, 잡히는 머리가 없네.”

새삼 대단한 발견을 해낸 듯 아내가 혼자 큭큭 웃기 시작한다.

“그러게 말야, 허허.”

뭐 어쩌랴, 나도 헛웃음으로 받아주니 아내는 자신의 뛰어난 유머감각에 스스로 도취되기 시작한다.

“공사면적 줄어드니 시간 절약 되서 좋네, 하하”

“(난 재미없거든…) 그럼 아예 밀어버려?”

“아냐 아냐. 당신 뒤통수는 절벽이라서 안 돼, 절벽! 아하하하”

자기 유머에 업된 아내는 언제나 그랬듯이 특유의 이발 값 계산으로 좋은 기분을 이어간다.

“내가 당신 머리 깎아줘서 세이브한 돈이 엄청 날거야, 응? 애 대학도 보내고 말야.”

어느새 아랫머리 바리캉 벌초는 끝나고 윗머리를 다듬을 순서다.

“어, 가위 어디 갔지?… 아, 어제 라이너스 깎아주고 아래층에 뒀나 보네.”

욕실에서 아내가 나가고 혼자 남는데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든다. ‘내 머리 깎는 가위로 강아지 털을 깎아? 그래도 되는 건가? 안될 건 또 뭐지… 아냐, 그래도 이건 아니지!’

분기가 탱천하여 텅 빈 머리끝까지 치오르는 순간 아내가 돌아왔다. 가위를 손에 쥔 아내. 내 정신도 돌아왔다. 침착하게 물어본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 개랑 같은 가위 써도 괜찮은 거겠지?”

“뭐, 털이 다 털이지.”

순간 또 아내의 입가가 씰룩한다.

“라이너스랑 같은 대접 받는 걸 영광인 줄 아셔! 아하하하”

아내에게는 오늘이 유머가 되는 날이다. 나는 개 대접 받아 황송한 날이고. 

필자와 가위를 공유했던 강아지 라이너스. ⓒ정재욱
필자와 가위를 공유했던 강아지 라이너스. ⓒ정재욱

8년 전의 일기다. 그 사이에 라이너스가 우리 곁을 떠났고 그나마 버티던 내 머리카락들도 정수리 훤하게 내게서 떠났다. 머리를 자르는 둘만의 시간은 그 간격이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집에서 이발을 하는 것은 비용절감, 돈의 문제만이 아니다. 제대로 깎는 곳을 찾기 어려워서다. 이민 초기의 한국식 이발소는 주인들이 은퇴하며 사라진지 오래다. 한인타운에 가면 유니섹스라고 써놓은 미용실들이 있기는 한데 젊은이들이 주로 찾는 터라 물 흐릴까봐 주춤거리게 된다.

프랜차이즈 미국 숍들이 동네에 있기는 한데 한번 호되게 놀라고 나서는 가지 않는다. 미용학원 갓 마친 초보들이 거쳐 가는 곳인지 죄다 군인머리, 깍두기 치듯이 밀어서 내보낸다.

집에 부스를 갖추고 야매로 하는 분들 중에 숨은 실력자들이 있기는 한데 내 편한 시간으로 약속을 잡기가 여의치 않다. 그러니 집에서 손재주 있는 아내가 다듬어주는 것이 내게는 최선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아내에게 머리를 맡긴다. 아내도 기꺼이 맡는다. “이거 뭐 얼마 되지도 않네.”

그렇게 말은 해도 머리털 개수 준만큼 시간이 따라서 줄지는 않았다. 적은 숱으로 많게 보이게 하려면 더 공을 들여야 한다. 오른쪽 머리를 길러서 중원의 텅 빈 대지를 횡단시켜 왼쪽으로 넘기는 첨단미용술을 아내는 구사한다. 내 보기에도 흡족하다.

“그나마 내가 주변머리라도 있으니까 가능한 거잖아?”

없는 잔머리 굴려 내 딴에는 유머랍시고 던졌다. 쿡 웃는 듯 하더니 그걸로 끝. 그래도 속으로는 많이 웃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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