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한 날씨가 이어진 27일 오후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산 인근에 관광객들이 찾아와 활짝 핀 유채꽃을 감상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지난해 3월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산 인근에 관광객들이 찾아와 활짝 핀 유채꽃을 감상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며칠 전 아내와 남해 여행을 다녀왔다. 다랭이마을, 보리암, 눈 가는 곳마다 펼쳐진 바다 풍경, 어디든 경기도 촌놈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지만 시선을 끄는 풍광이 하나 더 있다면 바로 마늘과 시금치밭이었다. 2월 중순의 남해는 어디를 가나 시금치와 마늘밭이 있다. 오랫동안 음식을 하다보면 그럴싸한 식재료에 군침을 흘리는 건 거의 본능이다. 게다가 이곳 시금치는 섬초, 남해초라 하여 동네 슈퍼에서도 훨씬 몸값이 높지 않던가.

“한 부대 사가소. 호부 4000원이라예. 저그서는 양이 더 적은데 5000원 달라칼기라.”

다랭이마을 근처 어느 밭, 할머니가 우리를 불러세운다. 커다란 비닐봉지의 시금치가 보기에도 양이 넉넉하다. 동네 슈퍼에 가면 최소 15000원은 달랄 법하다.

“하나 사갈까?”

“저걸 어떻게 들고 다니게요? 차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조금 고민이 되기는 했다.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올라가도 지하철과 광역버스를 갈아타야 겨우 집인데 여행 다니는 내내 안이 훤히 드러난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겠다고? 그래도 난 고집을 부려 기어이 시금치를 사고 만다. 조금 창피하고 불편하다고 훌륭한 식재료를 외면하기엔 일단 난 너무도 부엌데기다. 돌아서려는데 밭 가장자리 여기저기 노지냉이와 곰보배추도 기지개를 켜고 있다.

서울 사람들은 슈퍼에서 식재료를 얻겠지만 알고 보면 봄 들판이야말로 초대형 식자재 마트다. 텃밭은 4월 말쯤 본격적으로 작물을 심기 시작해 6월이 되어야 지은이 몫을 챙기지만 들판은 겨울 얼음이 녹으며 일찌감치 넉넉한 인심을 드러낸다. 내가 농사를 짓는 곳이 경기 북부 지역이라 남녘보다 늦기는 해도 3월 초면 냉이, 쑥을 시작으로 들판이 온통 고급 식재료로 뒤덮인다. 달래, 망초, 지칭개, 민들레 등, 4월이면 그 자리를 다시 전호, 두릅, 다래순, 고추나무순, 화살나무순, 엄나무순 들이 이어간다. 예쁜 꽃이 안쓰러워 채취를 못해 그렇지 3월 말 강가 바위를 가득 덮는 돌단풍도, 어디서나 불쑥불쑥 솟아나는 제비꽃도 예전에는 나물요리로 한가닥하던 친구들이다.

다래순, 망초는 말려서 묵나물을 만들고 고추나무순, 전호 등은 살짝 데쳐 냉동하고, 달래, 두릅, 엄나무순들은 장아찌를 해두면 제철이 지나도 언제든 쉽게 맛난 나물 요리를 즐길 수 있다. 더욱이 자연 마트에서야 모두가 공짜가 아닌가! 따뜻한 날씨, 예쁜 꽃들……우리 부부가 봄을 기다리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겠으나 그중 으뜸이 바로 자연이 선사해주는 이 나물들이다. 오래전 서울을 등지고 이곳 시골로 내려온 이유이자 서울로 돌아가지 않을 이유이기도 하다.

집에 돌아와 시금치를 조금 무쳐 아침 식탁에 내놓았다. 소금물에 살짝 데친 뒤 집간장, 마늘, 들기름, 통깨로 조물조물 무쳤더니 아내도 달고 맛나다며 좋아한다.

“기대해도 돼요. 나물 요리는 이제 시작이잖아.”

아내도 나물을 좋아하기에 2월 말, 텃밭 문 열기를 나만큼이나 고대한다. 텃밭 작물보다 노지 나물의 맛과 향이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은 이제 아내도 안다.

“애들도 다 독립해 나갔는데 음식하기 귀찮고 힘들지 않아?”

“아니, 그럴 리가. 난 처음부터 자기 전용 요리사였잖아. 여든네 살까지는 해줄 테니까 염려 붙들어 매도 돼요.” 내 장난 같은 선언에 아내가 피식! 웃고 만다.

봄이 온다.

맛난 나물의 계절이 온다. 

조영학/ 번역가, 『상차리는 남자! 상남자!』 저자
조영학/ 번역가, 『상차리는 남자! 상남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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