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4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앙카라에 있는 스웨덴 대사관 밖에서 시위대가 이슬람 경전인 쿠란을 낭송하고 있다. 시위대는 스웨덴에서 덴마크 극우 정당 라스무스 팔루단 대표가 쿠란 사본을 불태우며 반튀르키예 시위를 벌인 것에 분노해 시위를 벌였다. [앙카라=AP/뉴시스]
지난 1월 24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앙카라에 있는 스웨덴 대사관 밖에서 시위대가 이슬람 경전인 쿠란을 낭송하고 있다. 시위대는 스웨덴에서 덴마크 극우 정당 라스무스 팔루단 대표가 쿠란 사본을 불태우며 반튀르키예 시위를 벌인 것에 분노해 시위를 벌였다. [앙카라=AP/뉴시스]

2023년 1월 23일 스웨덴 스톡홀름 투루키예 대사관 앞에서 거행된 이슬람 경전인 ‘쿠란(코란)’을 불태운 사건 이후 이슬람 국가들의 스웨덴 국기 화형과 수입 거부는 날로 확산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승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스웨덴은 “민주주의의 인권 사항인 집회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어 벌어진 사건이지만 튀르키예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된다”라는 외교적 수사를 사용해 발표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웨덴이 권위적 국가인 튀르키예에 유감이나 사과를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표현의 자유로 인해 벌어진 사건을 이해해 달라는 메시지를 담아 발표한 것이다. 이슬람 국가들의 감정을 더욱 악화시킨 원인으로 해석되고 있다. 당장 이웃국가 핀란드와 함께 2022년 7월 5일 제출한 나토 가입에 빨간 불이 들어 온 셈이다.

중립정책 고수한 스웨덴의 선택

스웨덴은 우크라이나 침략 전까지 나토 가입에 소극적이었다. 나토는 2차 대전 이후 소련의 남하에 대비하기 위해 자유서방국가 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군사조약 기구였기 때문에 1815년 이후 비동맹 중립정책 채택해 왔던 스웨덴으로서는 정책을 폐기할 이유가 없었다. 국민들이 200년 이상 유지해 온 이 정책에 압도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웨덴 국민들이 중립국 정책 지지에는 이유가 있었다. 2차 대전 당시 이웃 국가인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독일의 침략을 받아 5년 동안 고통을 받았지만, 스웨덴만은 온전하게 국토를 보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이후 영국과 미국 주도로 나토를 창설할 때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나토 가입을 선택했지만 스웨덴은 단호하게 중립정책을 고수했다. 강력한 국방력과 중립외교를 바탕으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1990년대 냉전체제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로 평화 체제가 찾아 왔을 때 많은 나라들이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오판이 뒤 따랐다.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가 쓴 『역사의 종말』이 출판된 것도 이 때였다. 공산주의의 붕괴로 민주주의는 더 이상 도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서였던 셈이다.

모든 나라가 군축을 서둘러 진행해 나갔다. 스웨덴도 예외가 아니었다. 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국방비를 절약해 복지에 투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해 구축했던 동해안 경비대를 해체했다. 최동단 고틀란드 섬에 배치되어 있었던 공군과 포병부대가 해체되었고, 해군기지도 폐쇄했다. 러시아의 재무장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판 때문이었다.

하지만 후쿠야마는 당시 쓴 책이 큰 실수임을 인정했다. 2014년 러시아가 전격적으로 크림반도를 점령하면서 신 냉전의 서막을 알리고 나서나. 이 때부터 서방세계는 다시 긴 잠에 깨어났지만 20년 동안 너무 많은 것을 잃은 뒤였다. 비용 면에서 단기간에 동원될 수 있는 예산은 한정되어 있다. 더 큰 문제는 군부대를 새로 조직하고 무기를 배치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쿠란 사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스웨덴은 2010년 징병제를 폐지하고 직업군인제로 전환해 시행하고 있었다. 징병제의 폐지도 예산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예산 절감을 가장 쉽게 할 수 있었던 방법이 군대의 축소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2014년 크림반도 점령 이후 2017년부터 서둘러 다시 징병제를 부활시켰으나 군부대 확충과 예산 확보 문제로 1년에 5000명 정도의 군병력을 훈련시킬 수 있는 능력 밖에 되질 못했다.

결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시점에서 스웨덴은 200년 이상 유지해 오던 중립정책을 폐기하고 나토에 가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셈이다

쿠란 사태 이후 튀르키예의 인준은 당분간 물 건너 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반전이 생겼다. 이번 대지진 참사 때 스웨덴은 구조 요청이 오자 재빠르게 구조대, 의사, 간호사, 특수구조시설, 의약품 등을 싣고 군수송기를 동원에 급파했다.

이제 새로운 국면에 들어간 셈이다. 외교 관계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스웨덴의 나토 가입 문제를 두고 진행된 일련의 사태 발전을 보면서 국가의 안보와 국방문제는 오판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는다. 동시에 국민 인권의 보호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 국가의 최고 수호의 대상이라는 것 또한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 정치학과 교수 ⓒ여성신문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 정치학과 교수 ⓒ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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