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으로 간 성폭력』
김보화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시장으로 간 성폭력』(김보화 지음/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시장으로 간 성폭력』(김보화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아니, 왜 형량이 저것밖에 안 돼?’

성폭력 범죄자의 재판 소식을 보면 자주 품게 되는 의문이다. 미투(me too)운동 이후로 피해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디지털 성폭력이 수면 위로 드러나며 엄벌에 대한 국민의 요구 또한 나날이 높아졌다. 범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 것은 정의의 측면에서 합당하다. 하지만 성범죄 판결에서만큼은 국민의 법 감정에 맞지 않는 ‘솜방망이’ 처벌이 난무하는 듯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저자는 그 원인 중 하나로 ‘성범죄 가해자 지원산업’을 꼽는다. 법조 시장이 개방되고, 온라인 광고가 활발해지자, ‘아는 사람에게 변호사를 소개받기는 뭐한’ 성범죄를 전담하는 법무법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주로 가해자를 고객으로 하는, 성범죄 ‘가해자’ 전담법인이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성공 사례’ 몇 건, ‘판·검사 출신 변호사’를 내세우는 성범죄 전담법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성공 사례에는 ‘안일하게 대응할 경우 억울하게 처벌받을 수 있다’며 ‘충분한 조력을 받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면 혐의를 벗어날 수 있다는 식으로 담당 변호사가 코멘트를 붙인다. 전과가 남으면 직장을 잃을 위험이 있는 가해자에게 이런 공포마케팅은 성공적이다.

아이러니는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 강해질수록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라는 명분으로 법시장화는 더 활발해지고, 성범죄 전담법인 선임은 가해자의 합리적인 대응 수단으로 둔갑한다는 점이다. 이들 법무법인은 가해자의 ‘꼼수 감형’을 위해 갖은 증빙자료를 만든다. “진지한 반성”을 보여주기 위해 여성단체에 기부하거나 사회봉사를 하고, “사회적 유대관계 분명”을 증명하기 위해 가족과 지인이 쓴 탄원서를 제출한다. 헌혈, 정신과 치료, 고도비만에 이르기까지 감형을 위한 사유는 재판부가 쌓은 선례에 의해 다양해지고 있다.

더 나아가 가해자 전담법인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뒤바꿔버리는 ‘역고소’ 전략을 시행하기도 한다. 피해 고발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지인들이 도와줄 경우 그들까지도 명예훼손 등으로 기획적으로 고소하는 경우다. 이는 피해자를 의도적으로 무력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피해자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경제적 부담을 감내하고서라도 비싼 사선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실제로 큰 비용을 지불하기도 한다. 이처럼 성폭력 재판은 실체적 진실을 위한 과정이라기보다, 누가 더 많은 자본을 가지는가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경제적인 문제로 변질되고 있다.

가해자가 합리적 소비자가 되는 사이, 피해자의 위치는 어떻게 됐을까. 성범죄 가해자 전담법인의 전략은 성범죄 판례를 오염시켰고, 재판부 역시 가해자의 억울함에 지나치게 공감하면서 피해자를 의심하는 태도가 만연해졌다. 이에 따라 성별권력을 외면한 채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신피해자론’이 강화됐다. 이런 환경에서 피해자는 재판 과정 내내 ‘피해자다움’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재현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증인으로 발언할 때 너무 씩씩하면 ‘당할 때는 왜 그렇게 말하지 못했냐, 피해자답지 않다’며 의심을 사기 때문이다. 피해를 겪었다고 해서 늘 우울하고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재판부에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통과 감정을 계속해서 편견에 맞게 관리해야 한다.

저자는 이제 성폭력을 둘러싼 인식과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피해자들은 무력하게 수치스러워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싸우는 주체로서, 재판장을 투쟁의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피해자의 법적 권리는 ‘보호’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 참여할 수 있는 체계가 부족하다. 우리도 일본, 독일 등 일부 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피해자참가제도’ 등을 검토해,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직접 질문하고 책임을 추궁할 수 있게 함으로써 ‘당사자’인 피해자가 법정에 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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