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워킹맘이 출근 전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 시키고 있다. ⓒ이정실 사진기자
한 워킹맘이 출근 전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 시키고 있다. ⓒ이정실 사진기자

성평등 혹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저출산을 어떻게 설명하고 다루어야 할까. 새삼스러운 질문처럼 들리겠지만,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 이에 관한 입장차이가 있다. 성평등정책 연구자들은 저출산을 돌봄 서비스 확충 등 성평등 정책발전을 위한 중요한 모멘텀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저출산정책이라는 말만 들어도 발끈하는 여성주의자들이 있다. 이것은 급진적인 여성주의자들의 태도이고, 저출산 대응책으로서 성평등정책 발전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책연구로 먹고사는 타협적인 여성주의자들의 태도일까. 가족을 전공한 여성학 학도이자 성평등정책 연구기관에서 일해온 필자는 여성주의 입장에서 저출산정책에 관한 논의가 더 충분해지길 기대한다. 

어려움만 제거된다면 여성들은
출산과 양육을 원하고 선택할까?

저출산에 대한 접근이, 어려움만 제거된다면, 대개의 여성들이 출산과 양육을 원하고 선택할 것이라는 전제를 부지불식중에 내포하지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경향이 좀 완화되었지만, 연구들과 대중매체들은 “문제가 있어서 결혼과 출산을 선택하지 못한다”는 담론을 쏟아내 왔다. 여성주의 정책논의들은 이 기회를 틈타 그 해결방향으로 성평등을 강조할 수 있었다. 

출산과 결혼의 선택이 어려워진 사회적 맥락이 있다는 것도 맞고 정책은 그것에 집중해야 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담론의 쏠림 현상이 출산과 결혼을 둘러싼 행동과 가치관, 정체성의 변화에 관한 이해의 폭을 좁히는 것은 문제다. 사회적 제약을 강조하는 논리 속에서 여성들은 연애와 결혼, 출산을 원하지만 못하는 존재로 재현된다. 결과적으로 다른 생애경로를 걸으려는 여성들의 존재는 잊힌다.

여성의 몸은 출산을 위한 도구인가
저출산담론, 강제적 모성의 관계

이러한 맥락에서 저출산정책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거부감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개념적으로는 ‘강제적 모성’ 개념이 유효하다. ‘강제적 모성’ 개념은 출산과 양육이 여성의 생물학적 운명이자 여성 개인의 선택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은 가부장적 사회질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사건이기도 하며 개인선택을 넘어선 차원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이해시켜 준다. 

‘강제적 모성’의 질서 속에서 여성의 몸은 일차적으로 출산을 위한 몸으로, 여성이라는 존재는 잠재적 어머니로 인식된다. 저출산담론이 강제적 모성과 거리를 두지 않는다면 여성과 여성의 몸을 출산을 위한 도구로 여긴다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그런데 이런 분노 때문이었을 테지만, “저출산이 도대체 어떤 여성들에게 불편을 주는가?”라고 말하는 여성주의자들을 본 적이 있다. 전지구적인 차원에서는 이러한 질문이 의미가 없지는 않다. 저출산은 전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과 일본, 서남부 유럽의 잘 사는 나라들의 문제이기 때문이고, 인구과밀은 환경파괴 등의 문제를 낳았기 때문이다. 

마을에 어린아이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이가 살기 어렵게 하는 무엇이 있는 것

한국사회에서 저출산은 그 속도의 급격함 때문에 심각한 위기를 낳고 있다. 이 글에서 인구위기를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든 여성들이 어머니가 되고 싶어한다는 통념은 강제적 모성 제도가 만들어낸 모성신화임이 분명하지만, 모든 여성들이 어머니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것도 지나친 주장이다. 아무도 자녀를 원하지 않고 낳지 않는 사회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마을에 어린아이가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마을이 어린아이가 살아가기 어렵게 하는 무엇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강제적 모성을 비판하느라,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마을에 대해 마땅히 품어야 할 의문을 간과한다면, 단지 여성만이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관점이어야 할 여성주의의 시야를 좁히게 될 것이다. 

박혜경 충북여성재단 대표이사
박혜경 충북여성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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