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인기 여성서사 웹툰이 창극으로
이소연·김금미 등 간판스타 대활약
공들인 음악·연출·무대 디자인에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 말맛까지
29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공연 사진. ⓒ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공연 사진. ⓒ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공연 사진. ⓒ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공연 사진. ⓒ국립극장 제공

1950년대 ‘아이돌’ 여성국극단이 돌아왔다. 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는 요즘 공연계 최고 화제작이다. 개막 두 달 전에 전 좌석이 매진되더니, 막이 오르자마자 호평이 자자하다.

동명의 인기 웹툰이 원작이다. 1990년대생 여성 작가들(글 서이레, 그림 나몬)의 작품으로, 여성 공동체 ‘매란국극단’을 배경으로 목포 출신 천재 소리꾼 ‘윤정년’과 여성 예인들의 도전, 성장, 연대를 다룬다. 성역할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스스로 길을 내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2020년 ‘올해의 양성평등 문화콘텐츠상’, ‘2019 오늘의 우리 만화상’ 등을 수상했다.

국립창극단은 이 탄탄한 원작에 새로운 활기를 더했다. 공들인 소리와 음악에 연출·무대 디자인의 디테일도 놓치지 않은 수작이다. 중간휴식(인터미션) 없이 120분간 공연이 이어져도 지루할 틈이 없다. 

‘믿고 듣는 소리꾼’ 이자람이 작창·작곡·음악감독을 맡아 원작의 명장면을 50여 곡으로 표현했다. 현대적 요소를 더한 창작곡, 그 시절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신민요, 전통 판소리까지 고루 배치했다.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춘향가 중 ‘사랑가’), “새가 날아든다 웬갖 잡새가 날아든다”(새타령), “네 이놈 조조야”(적벽가) 등 대중에게 잘 알려진 곡들이 듣는 재미를 더한다.

여성 소리꾼들은 능수능란하게 관객을 쥐락펴락한다. 윤정년 역 소리꾼 이소연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국립극장 기획공연 ‘명색이 아프레걸’에서 한국 최초 여성감독 박남옥 역, ‘트로이의 여인들’ 카산드라 역 등을 맡아 입체적이고 선구적인 여성들을 재현해온 국립창극단의 간판스타다. ‘춘향전’ 방자로 분해 실실 웃으며 촐랑대다가, 창법을 싹 바꿔 간드러지게 ‘목포의 청춘’을 부르곤, 눈빛이 바뀌어 애절하고 황홀한 소리로 듣는 사람 가슴에 불을 지른다.

윤정년의 어머니 ‘채공선’ 역 김금미 명창의 아우라도 강렬하다. “추월은 만정하여 산호주렴에 비쳐들 제....” 심청가의 ‘추월만정’이다. 명창의 성음은 깊고 애달파 첫 소절부터 관객을 압도한다. 채공선은 한 시대를 풍미한 ‘소리 천재’다. 그러나 삶의 곡절에 다 놓고 목포에 은둔한 지 오래다. 국극의 맥을 잇겠다는 딸을 감싸 안듯, 용기를 북돋아 주듯 노래한다. 객석에선 탄식을 닮은 추임새가 터져 나왔다.

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공연 사진.
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공연 사진.
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공연 사진. ⓒ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공연 사진. ⓒ국립극장 제공
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공연 사진.
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공연 사진.

윤정년의 라이벌이자 국극단의 차세대 스타 ‘허영서’(왕윤정), 윤정년의 팬이자 사회가 강요하는 ‘여성의 역할’ 대신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권부용’(김우정), 여성성과 남성성을 오가며 젠더 차별을 예리하게 꼬집는 ‘고사장’(이연주), 국극단을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단장 ‘강소복’(김미진) 등의 활약도 대단하다. 남성 소리꾼들의 열연도 빼놓을 수 없다. 극의 서사를 구축하는 조연이자 앙상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윤정년이 구사하는 전라도 사투리의 말맛도 잘 살렸다. 인물의 껄렁하거나 어수룩한 면모를 그리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이 무대에선 주인공의 한 정체성이자, 극의 감칠맛을 더하는 요소다. 

여성 전문가들이 협력해 만든 작품이다. 창작 판소리극 ‘사천가’, ‘억척가’ 등으로 판소리의 현대화에 힘써온 남인우 연출과 이자람 작창·작곡·음악감독, 제16회 차범석희곡상을 수상한 김민정 작가, 정민선 무대미술가, 이윤정 안무가, 유미양 의상·장신구 디자이너 등 주요 제작진은 모두 여성이다. 

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공연 사진.
국립창극단 신작 ‘정년이’ 공연 사진.

여성국극은 1940년대 여성 소리꾼들이 주축이 돼 만든 공연예술 장르다. 오직 여성들만 무대에 선다. 영웅·로맨스 등의 이야기를 소리와 춤, 화려한 분장과 의상, 무대 효과 등으로 표현해 1950~60년대 인기몰이를 했다. 실로 “왕자가 사라진 시대의 왕자”들이었다.

그러나 외면받고 잊힌 여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극에선 다루지 않지만, “전쟁이 끝나고 가부장적 국가를 만들어가는 시대에 여성으로만 이뤄진 연극이라고, 여장 남자가 나온다고 동성애 어쩌고 비난받”았고, 기록하고 전승할 만한 가치로서 역사에 남지 못하고 사라진 게 여성국극이다. 원작 웹툰이 그랬듯, 국립창극단의 ‘정년이’가 잊혀 가는 여성국극사를 불러오길 바란다. 여성들의 예술과 업적을 재기발랄한 방식으로 기억하고 기념하는 이 명민하고 유쾌한 작품이 더 많은 관객과 만나면 좋겠다.

객석의 열기는 이미 뜨겁다. 지난 18일 공연 커튼콜에선 열렬한 박수와 환호에 퇴장했던 배우들이 다시 무대로 나왔다. 연주자들도 일어서서 박수로 화답했다. 젊은 관객들이 소곤댔다. “소리가 이런 거야?” “창극 재밌네.” 판소리는 고루하다고만 여겼다면, 그 많은 여성 소리꾼들은 다 어딜 갔나 궁금했다면, ‘정년이’를 보시라. 봄날의 선물 같은 공연이 찾아왔다. 오는 29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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