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가오는 것들’ 리뷰
사고력 발전에 대한 욕구와 이유

영화 ‘다가오는 것들’ 스틸컷.
영화 ‘다가오는 것들’ 스틸컷.

“생각과 행동의 일치는 중요해요. 선생님 교육엔 없었던 거죠.”
성장한 제자가 스승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스승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뼈아픈 비판 앞에서 스승이 보여주는 자세로 참 스승 여부가 확인되지는 않을까. 제자의 장서에서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저자의 책에 코웃음치고 ‘네가 슬라보예 지젝(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을 참고할 줄은 몰랐다’며 타인의 생각을 콘트롤하는 스승에게 제자는 ‘내가 가지고 있는 책과 내 생각은 다르다’고 말한다. 실제로 타인의 생각들은 내 생각을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도전적 거울이기에 우리는 때로 열린 토론의 장을 펼치고 사고의 방향성을 확보한다.

함께 있으나 따로 존재하는 사람들

영화는 겨울 휴가를 즐기는 나탈리(이자벨 위페르 분) 가족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고등학교 철학 교사인 남편과 두 남매는 뱃전에, 역시 같은 직업을 가진 나탈리는 실내에서 학생들의 과제를 채점하고 있다. 과제의 제목은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가.” 남편 하인츠(앙드레 마르콩 분)가 밖에서 유리창을 두들기며 경치가 좋으니 나오라고 한다.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기자는 말이다. 나탈리는 과제물에 ‘AA’라는 높은 점수를 주고 일어선다. 이어 ‘음악은 듣기와 보기를 같이 해야 한다’는 하인츠의 말에 나탈리는 의아하고, ‘파도와 바람 소리(불변의 것)’만 듣고 싶어 했다는 시인 샤또브리앙의 기념석의 글귀, 묘비 앞에서 사색하다 돌아서는 하인츠의 모습 위로 뜨는 프랑스어 원제 L’Avenir(The Future)의 자막. 두 사람의 미래가 고요 속에서 어긋나며 흘러들고 있음을 본다.

식탁에서 티격태격, 어쩌면 정겨운 부부의 일상적 신경전이지만, 불편하게 지켜보던 딸 끌로에(사라 레피카르드 분)가 아버지를 찾아와 ‘다른 여자가 있는 거 알고 있다’며 되도록 빠른 결정을 부탁하고, 하인츠는 곧바로 나탈리에게 ‘그 여자와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말에 응당 보일 반응을 나탈리는 보이지 않는다(못한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 혼자만 알고 있을 수는 없었어?” 쿨하게 들릴 수 있는 이 대사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갑갑한 형태로 재생산되면서 다른 장면들에서 연쇄반응처럼 반복된다. 거의 모든 장면에서 나탈리는 제대로 된 대화가 아닌 ‘감정’만을 드러낸다. 나탈리가 ‘AA’를 준 학생의 과제는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진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 스틸컷.
영화 ‘다가오는 것들’ 스틸컷.

정당한 분노, 음울한 분노

“평생 날 사랑할 거라더니. 내가 등신이지.” “사랑이야 영원히 하지.”
‘사랑’에 대한 이들의 견해는 ‘철학’의 통속적 고아함을 떠나 있다. 나탈리는 이혼하면 남편 소유의 바닷가 별장에 더 이상 갈 수 없음을 아쉬워할 뿐이다. 쇼펜하우어를 흠모하는 하인츠는 ‘나 없이 아이들과 함께 올 줄 알았다’고 하자 나탈리는 정신 차리라며 화를 내고 이 분노 역시 방향을 상실한다.

인간 정신의 부조리는 자신의 사고와 감정을 불신하는 데서 온다. 정당한 분노는 대화의 한 형태이나 타이밍을 놓치면 음울하게 찾아드는 자책과도 같은 분노와 마주해야 한다. 하인츠가 별거 중 보낸 꽃을 쓰레기통에 쑤셔 박다가 장미 가시에 찔리고, 꽃을 담았던 일회용 장바구니를 다시 집어 오는가 하면, 잦은 전화로 자신을 괴롭히던 엄마와 통화가 되지 않자 맨발로 진흙을 밟으며 터지지 않는 휴대폰을 들고 비척거리는 나탈리의 모습은 안타깝고 허허롭다.

나탈리, 파비앵, 하인츠와 철학자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철학 서적을 비롯해 온갖 서적을 읽어내고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지만 학교에서 받는 월급과 엄마가 자랑스러워했다는 것을 제외하곤 이 책들이 나탈리에게 어떻게 공헌하는지 알 수가 없다. 눈물을 닦으며 “지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잖아. 그거면 충분해.”라고 애써 말할 때조차 나탈리는 눈물의 진정한 의미를 무색하게 한다. 눈을 뜬 채 어딘가로 가는 공허한 시선. 따라서 스승을 위로하는 제자 파비앵(로만 콜린카 분)의 시선도 분산된다.

“여자는 사십 넘으면 쓸모가 없어.” “늙은이를 만나? 됐네요.” “연하하고 연애를? 내 취향 아니야.” 이런 대사들은 파비앵에게, 나탈리는 ‘교실’이라는 우물 속 개구리이며 스승의 의미가 다 했음을 암시한다. 파비앵의 농장에서 함께 지내며 작업하는 젊은 철학자들의 실천 지성에 합류할만한 재료나 도구를 나탈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정말로 ‘옛날에 다 해봤다’면 파비앵의 친구들이 유머 섞어 철학 논쟁을 벌이는 옆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방해라도 하듯 판도라를 소리쳐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탈리의 행동 패턴은 쉼 없는 움직임과 독서, 즉 자기 안에 있지 않고 ‘밖으로만’ 향해 있다. 육체와 정신 모두 어딘가로 향해 가기만 할 뿐, 자신 안에 머무르지 못한다는 얘기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조차 자신의 말이 아닌 『빵세』의 구절을 낭독하고, 혼자서 관람하는 영화가 ‘사랑을 카피하다(Certified Copy)’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나탈리 내면에 진품와 복제품이 혼재한다.

미아 한센 뢰브 감독은 인간 내면의 부조리와 아이러니를 철학적 통찰을 통해 해결하고 싶어 한다.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에 대한 그의 높은 애정을 존중해서 최선을 다해 ‘논리적 객관’을 중심축에 장착한 후, 감독의 시선에 동행해볼 수 있다.

지식은 인간을 이롭게 하는가. 어떤 사람에게 지식은 편의점 유통 상품이나 다를 바 없다. 삶에 적용하지 못하고 인간성 발전에도 공헌하지 못한다. 이 영화가 난해한 이유다. 자신의 정신적 상황을 대입해서 해석을 감행하곤 미로를 헤매다 피로해진 관객은 서둘러 결론을 내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 내면의 얼굴을 과감하게 마주 바라본다면 파도 소리나 바람 소리처럼 시원하게 이해되어 들려오기도 한다. 

영화 ‘다가오는 것들’ 포스터.
영화 ‘다가오는 것들’ 포스터.

다가오는 희망과 평화

한밤중 파비앵의 농장에서 야행성 동물인 고양이 판도라를 소리쳐 부르는 목소리와 구석에서 모닥불이 작은 빛을 발하며 타고 있는 씬은 이 영화의 미장센 중 압권이다. 나탈리 삶의 많은 부분이 어둠에 묻혀 있지만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 그러나 나탈리의 본능은 희망을 갈구하고 있는 걸까?

클로에가 출산한 병원에서 하인츠를 몰아내고 딸에게 자신의 감정에 대한 공감까지 강요함으로써 산모인 딸을 울게 하고,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보내기 위해 찾아와 눈치 보고 있는 하인츠를 아이들 오기 전에 가라며 쫓아내는 장면은 끝내 불편하다. 파비앵이 판도라를 입양하고 관객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실천적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딥 피스(Deep Peace)”의 선율과 함께 이상주의자 파비앵은 숲으로, 나탈리는 도시의 불빛 속으로 돌아간다. 지식과 그것의 창의적 실천에서 오는 개인의 미래는 생각과 행동의 응보로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것들’이다. 

필자: 문수인 작가. 시집 '보리밭에 부는 바람' 저자. 현재 SP 영화 인문학 강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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