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여성 대학원생이 말하는 연구실 실태]
여성 과학자 늘었으나 멘토 부족하고
남성중심 문화·성차별 발언도 여전
“과학기술계, 포용·평등 공동체 돼야”

학사 학위를 취득한 과학기술연구개발인력 중 남성은 66%, 여성은 34%를 차지해 2:1의 비율을 보였다. 반면 연구과제책임자 중에서는 남성 88.1%, 여성 11.9%로 남녀 성비 격차가 9:1까지 벌어지며, 10억 이상 대형 연구과제책임자에서 여성 책임자는 9.1%로 격차가 더욱 커지는 모습을 보였다. ⓒ여성신문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이 발간한 ‘2021년 남녀 과학기술인력 현황’에 따르면 연구과제책임자 중 남성 88.1%, 여성 11.9%로 성비 격차가 9 대 1까지 벌어졌고, 대형 연구과제책임자 중 여성은 9.1%로 격차가 더욱 커졌다.ⓒ여성신문

페미니스트로서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온 여성 대학원생 ‘세라’씨는 어느 날 연구실에서 교수님에 “너는 나중에 애 낳고 살림이나 할 거냐”는 꾸지람을 들었다. 명백한 성차별적 발언이지만 교수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연구실에서 가장 낮은 서열에 위치한 대학원생은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다, 세라씨는 고민 끝에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기업에 입사하는 길을 택했다.

7일 대전 유성구 대덕테크비즈센터에서 열린 한국여성학회 제1차 학술포럼에서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는 대학원생 이슬기씨와 강미량씨는 ‘실험실, 대학원생, 그리고 젠더’를 주제로 조용한 차별을 겪고 있는 여성 연구자들의 현실을 발표했다.

첫 순서를 맡은 대학원생 이슬기씨(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는 여성과학기술인들의 생태계를 ‘새는 파이프라인(Leaky Pipeline)’이라고 요약했다. 새는 파이프라인은 과학기술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경력이 쌓일 수록 점진적으로 분야에서 이탈하는 현상을 비유한 표현으로, 돌봄노동을 병행하느라 무한경쟁체제인 연구실 환경에서 뒤처지는 여성과학기술인들의 현실을 반영한 단어다. 이씨는 늘어난 이공계 여성들이 연구책임자까지 진급하기 어려운 이유로 △폐쇄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연구실 문화 △여성 멘토의 부재 △여성의 생애주기를 고려하지 않는 근무환경 등을 꼽았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이 발간한 ‘2021년 남녀 과학기술인력 현황’에 따르면 학사 학위를 취득한 과학기술연구개발인력 중 남성은 66%, 여성은 34%를 차지해 2대 1의 비율을 보였다. 반면 연구과제책임자 중 남성 88.1%, 여성 11.9%로 성비 격차가 9 대 1까지 벌어졌고, 대형 연구과제책임자 중 여성은 9.1%로 격차가 더욱 커졌다.

여성 책임자의 부재는 교수와 학생이 1대 1로 매치해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공계 실습실 특성상 여성 과학인들의 실습실 적응과 진로설계를 도울 멘토를 찾기 어렵다는 말과 같다. 이슬기씨는 학내 성평등 문화와 여성 멘토 발굴을 위해 총여학생회 활동에 힘쓰던 여성 학우들이 대학원 입학 후 활동을 멈추는 경우를 많이 목격했다. 남성중심적인 연구실 문화에서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은 인간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원생 이슬기씨(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는 여성과학인들의 생태계를 ‘새는 파이프라인’이라고 요약했다. 이공계에 진출하는 여성의 수는 크게 늘었지만 관리직까지 올라가는 여성과학인은 여전히 적기 때문이다. ⓒ박상혁 기자
대학원생 이슬기씨(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는 여성과학기술인들의 생태계를 ‘새는 파이프라인’이라고 요약했다. 이공계에 진출하는 여성의 수는 크게 늘었지만 관리직까지 올라가는 여성과학인은 여전히 적기 때문이다. ⓒ박상혁 기자

이씨는 여성과학기술인의 수가 늘어났다고 성차별적인 문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며 2016년 대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겪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20명 남짓한 물리 실험 수업에서 이씨를 포함해 3명뿐인 여학생들이 하나의 프로젝트 조를 결성하자 담당교수는 걱정어린 표정으로 여학생들에게 "남학생들과 조를 짜도록 조정해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여학생들끼리 실험하는 것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그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성차별적인 발언을 한 셈이다.

세라씨는 강미량씨와의 인터뷰에서 연구실을 “도망갈 곳이 없는 폐쇄적 집단”이라고 설명했다. 하루 종일 연구실에 있는 대학원 생활 특성상 좁은 인간관계에 많은 영향을 받는데, 여성 과학인들은 절대적인 권력을 차지하는 교수에게 성차별적인 발언을 들어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라씨는 “부당함을 호소해도 불이익을 받는 사례가 많다”며 “연구실에 갇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강미량씨는 각종 화학물질에 노출되는 실험실이 암묵적으로 임산부 연구자를 배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씨가 인용한 칼럼 ‘엄마 과학자 생존기:내 배는 누가 지켜주나?’의 저자 윤정인 연구원은 임신으로 배가 나온 후 실험복을 입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각종 화학물질로 가득한 유기화학 실험실에서 실험복은 연구자의 몸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작용한다. 화학약품이 임산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밝혀진 게 없는 상황에서 체형에 맞는 실험복의 부재는 자연스레 임산부를 연구실에서 배제시킨다.

임신한 여성과학기술인을 소외시키는 요소는 실험복뿐만이 아니다. 브릭과 ESC가 2019년 발표한 ‘임신부 연구자 실험환경 설문조사’에 따르면 연구실 대부분에는 임산부를 위한 실험복, 고글, 마스크가 미비하며 유축 등을 위한 휴게실이 없다. 또한 대학원생은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에 단축근무나 육아휴직 등의 복지 여부가 지도교수의 재량에 달려있어 불이익을 받기도 한다. 임산부의 특수성을 포용하지 못하는 연구실 인프라에 여성과학기술인들은 자연스레 과학자로서의 연구 활동에 부담감을 느끼게 된다.

이씨는 발표를 마무리하며 연구실의 특성을 고려한 여성과학인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여성들이 연구실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연구실은 문제를 겪은 여성들에 어떤 답을 내게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씨는 연구실에서 여성과학인들이 겪는 문제는 여성의 문제와 대학원생의 문제가 교차해 발생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여성 과학인을 배려나 배제의 대상으로 타자화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를 포용할 수 있는 과학기술 공동체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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