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Disgrace)
조애나 버크 지음, 송은주 옮김, 디플롯 펴냄

『수치』(조애나 버크 지음, 송은주 옮김, 디플롯 펴냄) ⓒ디플롯
『수치』(조애나 버크 지음, 송은주 옮김, 디플롯 펴냄) ⓒ디플롯

전 세계적으로 다섯 명 중 한 명의 여성이 성적 학대를 겪지만, 피해자는 성폭력을 당했다고 말해도 진짜인지 의심부터 받는다. 남성들은 자신에게 성적 욕구를 충족할 권리와 본능이 있다고 믿는다. 위력을 내세운 권력자들의 성폭력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피해자가 아니라 ‘우리’가 이런 사실에 ‘수치’를 느껴야 한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흔히 ‘성적수치심’을 느낀다고 여겨진다. 피해자가 느끼는 감정은 수치심 외에도 분노, 모욕감, 무력감, 불쾌감 등 다양하지만 그 모든 감정은 ‘수치심’으로 대체된다. ‘처신을 어떻게 했길래’라며 탓하는 말, ‘씻을 수 없는 상처’ 등의 표현은 성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수준을 보여준다.

저자는 왜 수치가 피해자의 몫이어야 하는지 반문한다. 그러면서 성폭력을 지속시키는 이념과 제도, 법적 틀, 권력 구조를 수치를 느껴야 할 대상으로 지목한다. 듣는 이들이 변한다면 피해자도 더는 수치를 느끼지 않을 수 있다.

“피해를 무시하고, 폭력을 축소하거나 강간을 변명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방에서 (피해 사실을) 말한다면 수치심을 느낄 수 있지만, 페미니스트, 활동가, 분노한 생존자들이 가득한 방에서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강간 없는 미래”를 꿈꾼다. “유토피아적인 상상”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지금의 상황을 돌아보면 그 바람이 이뤄지기는 요원할 것 같다. 성폭력 문제는 정말 해결될 수 있을까.

희망은 연대하고 행동하는 이들에게서 온다. 한국 활동가들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요일마다 옛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연다. 오스트레일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정부와 법원에서 ‘가정 폭력’과 ‘부부 강간’을 인정하지 않을 때부터 피해 여성 보호시설을 운영하고, 단편 영화를 만들어 실태를 알렸다. ‘청바지를 입으면 강간당할 수 없다’고 판결한 이탈리아 대법원에 맞서 페미니스트들은 ‘정의를 위한 국제 청바지의 날’을 만들었고, 끝내 종전의 판례를 뒤집은 판결을 얻어냈다.

저자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동료애와 협력, 우정, 사랑을 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행동하는 ‘사람’들로 인해 언젠가는 정말 “강간 없는 세상”, 가해자가 수치를 느끼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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