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강간 시도에 맞서 가해자 혀 깨문 여성
중상해죄 인정돼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잘못된 판결 바로 잡기 위해 2020년 재심청구
부산지법·고법 재심 기각… 대법 판단 기다려

59년 전 만 18세였던 최말자씨의 삶은 한 사건으로 완전히 뒤집혔다. 길을 모르겠다는 노모씨에게 길을 알려주려다 강간을 당할 뻔한 것. 최 씨는 노 씨에 맞서다 그의 혀를 깨물었다. 명백한 정당방위였지만 이후 검찰에 조사를 받고 구속된 것은 최 씨였다. 중상해죄를 저질렀다는 이유에서였다.

1964년 최씨는 강간 시도에 저항하다 가해자의 혀에 상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가해자’가 됐다. 최씨는 중상해죄가 인정돼 부산지법에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가해자는 정작 성폭력 미수로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 혐의로 최씨보다 가벼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시민사회단체들은 지난해 5월 6일 부산 연제구 부산지방법원 앞에서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개시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법원에 재심 청구서를 접수했다. 사진=한국여성의전화 제공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시민사회단체들은 지난해 5월 6일 부산 연제구 부산지방법원 앞에서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개시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법원에 재심 청구서를 접수했다. 사진=한국여성의전화 제공

56년만의 미투 외쳤지만
법원 “사건 뒤집을 수 없다”

최씨는 56년만인 2020년 5월 6일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청구서’를 법원에 접수했다. 그러나 부산지법과 부산고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죄로 볼 만한 명백한 증거가 없고, 사회문화적 환경이 달라졌다고 하여 사건을 뒤집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검사의 위법 행위를 입증할 객관적이고 분명한 증거가 제시되지 못했다는 이유도 들었다. 일반 형사사건인 최씨의 수사·재판기록이 폐기돼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최씨와 그를 돕고 있는 여성단체는 이에 반발했다. 이들은 입장문을 통해 “헌법은 제10조에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중략)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하여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임을 천명하고 있다”며 “청구인은 1965년 사건 당시부터 정당방위를 주장하였으며, 56년이 지난 후에도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잘못을 지적하며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고자 재심을 청구하였다. 재판부는 같은 내용의 결정문을 반복할 게 아니라 56년 전 국가에 의해 인권을 유린당한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기 위해 재심 청구를 인용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56년 만의 미투, 재심 개시를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 일동이 '대법원은 재심 개시로 56년 만의 미투에 정의롭게 응답하라'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56년 만의 미투, 재심 개시를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 일동이 '대법원은 재심 개시로 56년 만의 미투에 정의롭게 응답하라'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모든 것 내려놓고 싶기도 했지만…
지금 바로 잡지 못하면 또 되풀이”

변호인단은 재항고장을 제출했고, 대법원의 재심 개시 여부 판단만이 남았다. 최씨와 288개 단체는 재심개시를 촉구하며 2023년 5월 2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대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최씨는 “너무 긴 시간에 몸이 지치다 보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후손들을 떠올리면서 지금 바로 잡지 못하면 이런 일이 또 되풀이될 것이고, 성폭력 피해 여성들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며 “사건의 재심을 다시 열어 명백하게 피해자와 가해자를 다시 정의하고 정당방위를 인정하여 구시대적인 법 기준을 바꾸라. 그래야만 여성폭력 피해자들이 성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며 더 이상 성폭력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31일 대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최말자 씨. ⓒ한국여성의전화
5월 31일 대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최말자 씨. ⓒ한국여성의전화

5월 한 달간 최씨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개시 촉구 릴레이 1인 시위가 이어졌다. 5월 31일에는 최씨가 직접 쓴 탄원서와 15,685명(5월 31일 기준)이 쓴 시민 참여 서명지를 대법원에 제출하기도 했다. 최씨는 직접 쓴 탄원서에서 “국가로부터 받은 폭력은 제 삶을 평생 죄인이라는 꼬리표로 저를 따라다녔다. 꽃도 피워보지 못한 그 소녀의 삶은 평생을 살면서 억울했고 분노하게 했다”며 “56년 만에 재심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했고, 항소 역시 기각되어 할 말을 잊고 억장이 무너졌다. 대법원 역시 3년이란 시간이 흘러가고 있지만 답변을 주지 않아 이 자리에 서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 사건은 단지 시대 상황에 어쩔 수 없는 판결이었다는 부끄러운 변명이 아니라 억울한 판결로 한 사람의 인생이 뒤집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제라도 정의로운 판단으로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땅에 떨어진 재판부의 명예를 회복하는 기회이기도 하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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