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문 '동문'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

정치권에 김애실 이계경 이은영 등...

여성매체 편집장으로 김미경 박미라 이은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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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영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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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덕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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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경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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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희 행복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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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 언론인

1988년 10월 <여성신문> 창간 전후 당시 여성리더들 중에서 <여성신문>에 연관 안 된 사람을 찾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이들은 자신의 처지에 따라, 시간과 능력, 마음과 돈을 아낌없이 보태왔다.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이 맞물린 시점의 연장선상에서 여성운동계의 '국민주' 형식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주의 정론지가 탄생한 만큼 이들의 <여성신문>에 대한 애정과 헌신은 남달랐다.

창간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여성인력이 밀물처럼, 또 썰물처럼 <여성신문>과 이타적 관계를 맺어왔고, '여성신문 출신'이란 것이 “헌신과 열정”의 인력임을 입증하는 하나의 상징이 되고 있어, 혹자는 <여성신문>을 두고 '여성인력 사관학교'란 애정 어린 별칭으로까지 부르고 있다.

창간 16주년 지령 800호를 내기까지 <여성신문> 발전에 헌신해온 이들의 발자취를 간략히 살펴본다.

창간 초기부터 여성신문과 인연을 맺어온 이들 중 유명을 달리 해 안타까움을 주는 여성들로는 대표적 여성주의 시인이자 이미 고인이 된 고정희 초대 주간과, PD출신에 방송작가로 활약했고, 탤런트 신애라의 어머니로도 잘 알려진 우명미 편집위원이 있다. 이밖에 여성신문의 초기 기틀을 닦은 편집위원들론 조형 이화리더십개발원장(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장필화 이대 대학원장(여성학과), 조은 동국대 사회학과 교수, 조옥라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그리고 현재 편집위원장으로, 또 장수 칼럼니스트로 독자들과 친숙한 박혜란 여성학자 등이 있다. 이들은 여성신문 지면을 통해 자신들의 '여성적' 글쓰기를 선보였는데, 특히 조은 교수의 자신의 대입 수험생 아들을 소재로 교육 현실을 자연스럽게 다룬 '어발이' 이야기나 박혜란 여성학자의 중국 유학 체험기 등은 많은 관심을 끌었고, 또 단행본으로도 출간됐다. 이은영 당시 외국어대 법대 교수는 여성신문 편집위원 회의에 참석했던 것을 지금도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엔 우리나라 여성 경제학 박사 1호인 김애실 외국어대 교수, 이인실 현 초대 국회예산처 경제분석실장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여성신문에 여성경제학자들의 칼럼을 연재, 여성문제와 경제학을 접합시키는 첫 시도를 하기도 했다.

소설가 박완서 씨는 초기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란 연재소설을 여성신문에 기고하는 한편, 여성신문 독자들을 이끌고 유럽으로 여성역사 여행을 떠나는 등 여성신문에 많은 힘을 실어줬다. 이후 공선옥 씨가 '수수밭으로 오세요'로 여성주의 연재소설의 맥을 이었다. 특히 박씨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는 지난해 한 방송사에서 아침드라마로 재현돼 호응을 얻기도 했다. 여성학자 오한숙희 씨는 '솔직히 말해서 나는 돈이 좋다', '아줌마 밥 먹구가'를, 카피라이터 최윤희 씨는 '행복, 그거 얼마예요' 등의 단행본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는데, 이는 거의 자원봉사(?) 개념으로 기고한 여성신문 연재의 결과물들이다. 최씨는 단행본의 히트로 후 한국을 대표하는 '행복강사'로 자리잡았다.

여성신문 배출인력의 활약은 특히 90년대 후반 이후 다른 여성매체들이 여성신문을 역할모델로 해 속속 창간되는 결과로 직결됐다. 여성신문 준비호 당시 김미경 초대 편집장은 후에 <한겨레> 창간멤버로 합류해 활동하다가 2002년 말 월간 <허스토리>가 창간되면서 초대 편집장이 됐다. 박미라 기자는 97년 5월 계간 <이프>가 창간되면서 초대 편집장으로 활약했다. 이은희 기자는 현재 주간 <미즈엔>의 편집장. 또 근래 들어선 진보 인터넷 매체로의 진출도 활발한데, <오마이뉴스>에선 김지은 기자가, <서프라이즈>에선 김경혜 나신아령 동김성혜 민원기 기자가 맹활약중이다.

여성 정치세력화를 위한 정계 진출로는 이계경(한나라당, 초대 발행인)과 앞의 김애실(한나라당, 국회 여성위원장), 이은영(열린우리당) 의원이 대표적이다. 이밖에 국회의원 보좌진 중엔 박광수 황금희 전 편집장, 이건 사업부장, 임정진 총무부장, (창간 후 두 번째 남성 취재기자였던)배영환 씨가 포진해 있다.

사업부에서 활약했던 박옥희 씨는 여성문화 기획사 '이프토피아' 대표로, 이상덕 씨는 서울여성의전화 회장을 거쳐 여성부 차별개선국장, 청와대 여성정책비서관으로 발탁됐고, 현재 안성기능여대 학장으로 재직 중이다. 기자 출신이었던 박혜숙 씨는 광고대행과 이벤트 사업을 겸하는 '서울미디어' 대표, 정혜옥 씨는 '굿인포메이션' 출판사 대표, 최창희 씨는 마음 출판사 대표가 됐다.

여성신문사를 금남 지역으로 아는 사람도 많지만, 홍일점으로 여성신문사를 경유한 남성들은 여성인력 못지않은 뚜렷한 행보를 걸었다. 초기 유일한 남성 취재기자였던 배문성 씨는 <문화일보> 문화부 차장으로 입지를 굳혔고, 여성신문의 대표 만화가 최정현 씨는 전업주부 남편으로서의 경험을 '반쪽이의 육아일기'란 만화로 연재해 평등부부 역할모델을 개척한 대표주자다.

박이은경 기자pleun@

우리는 왜 16년간 여성신문을 읽고 있나

“매주 새 사람·새 사상 만나 기쁘다”

- 서정자 초당대학교 교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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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문학 연구 1세대인 초당대 교양학과 서정자(61·사진) 교수는 여성신문 16년 애독자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해방 소설인 나혜석의 '경희'를 발굴하고, 최근 탄생 100주년을 맞은 소영 박화성(1904∼88)의 문학세계를 집대성한 '박화성 문학전집'(푸른사상사)을 출간한 바 있다.

전업주부 생활을 통해 여성문제를 공감한 그는 “남은 인생을 여성문학을 통해 여성문제의 실타래를 푸는 데 바치고자 79년 대학원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가 당시 국내에선 생소한 여성문학을 전공하며 나혜석, 박화성, 지혜련 등의 1920∼30년대 페미니스트 소설가들을 발굴하고 있을 때, 한쪽에선 해외 유학파들에 의해 여성학이 대학에 개설되었고, 여성들의 글쓰기모임인 '또 하나의 문화'가 탄생했다. 이처럼 국내로 밀려든 여성주의 물결과 그의 여성문학에 대한 애정은 88년 여성신문 창간 주주가 되는 것에 흔쾌히 동의하는 기반이 되었다.

현재까지 매호 꼼꼼히 기사를 읽는 애독자가 된 그는 신문이 올 때마다 “내 신문이 왔다는 마음으로 여성신문을 읽었다”며 “전공 분야로 시각이 협소해질 수 있는 나에게 사람과 새로운 사상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동지”라고 여성신문에 대해 정의했다.

“최근 신문 지면이 정치와 경제 등이 강화되는 것은 그만큼 여성의 사회 진출 분야가 다양해지고 세력도 형성되었다는 것을 뜻한다”면서도 여성문학 연구 대가로서 그는 “박완서의 소설 '그대 꿈꾸고 있는가' 등의 소설을 연재할 만큼 문화면에 두던 비중이 다소 줄어든 것은 아쉬운 일”이라고 토로했다.

또한 그는 여성신문이 여성의 관점을 놓지 않으려는 건강한 신문이라고 평하면서도 “'페미니즘'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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