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무대 벌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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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진의 동생 염상구가 돌아와 벌교 제일의 주먹이었던 땅벌과 희한한 결투를 벌이던 경전선 철다리 주위로는 갈대가 우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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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교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아치형 석교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304호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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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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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시와 벌교읍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진트재는 '태백산맥' 문학기행의 출발선이다.

진트재에서 내려다 본 질박한 삶터

대대포구를 나온 시골버스는 바닷물이 빠진 갯벌을 굽이돌아 진트재를 향했다. 갯벌에는 십수 명의 아낙들이 널빤지에 올라타고 부지런히 꼬막을 캐고 있다.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간간하고 쫄깃하며, 알큰하면서도 배릿한' 바로 그 벌교꼬막이다. 순천시와 벌교읍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진트재는 '태백산맥' 문학기행의 출발선이다. 서북쪽으로 길게 반원을 그리며 이어지는 산과 들판… .고갯마루에서 내려다 본 벌교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늑하고 포근하다.

'태백산맥'은 비록 소설이긴 하지만 벌교 땅의 실제 역사와 무대를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벌교는 한마디로 일인(日人)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벌판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한 것이다. 벌교 포구의 끝 선수머리에서 배를 띄우면 순천만을 가로질러 여수까지 반나절이면 족했고, 목포에서 부산에 이르는 긴 뱃길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생생히 되살아나는 현대사의 파노라마

200자 원고지로 1만6000여 장에 이르는 소설 '태백산맥'이 문을 여는 장소는 제석산 아래 자리잡은 현부자네 제각. 당으로부터 거점 확보를 명령받은 정하섭이 그 대상으로 점찍은 새끼무당 소화를 찾아가는 장면이다. 현부자네 제각에선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나카지마(中島)가 조선인 소작농들을 동원, 20리 벌교 포구를 따라 방죽을 쌓도록 해 조성한 중도들판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제각은 한옥을 기본 틀로 삼되 구석구석에 일본식을 가미한 독특한 양식. 가령 마루는 조선식에 천장은 일본식이고, 툇마루를 타고 돌아가면 본채와 붙어 있는 변소에 이를 수 있으며, 기와지붕 아래 처마에는 벚꽃 무늬를 단청으로 새겨 넣는 식이다. 행랑채가 붙은 흙 담장과 2층 누각 형태의 솟을대문이 볼거리. 최근 보수돼 대갓집의 풍모가 대단하다.

비밀임무의 수행이 주는 긴장감과 청춘남녀의 만남에서 오는 풋풋함이 미묘하게 어우러지며 시작되는 '태백산맥'은 여순사건의 끝자락부터 한국전쟁 직후까지 우리나라 현대사의 가장 긴박한 한 시기를 있는 그대로 비춰준다. 갯벌을 농토로 만들기 위해 바다를 막아 만든 중도방죽. 소설 속 벌교 소작민들이 등이 휘도록 돌을 나르며 내뱉는 “이것이 워디 사람이 할 짓인감”하는 목소리가 잊혀진 세월 저편으로부터 밀려와 귓전에 울려 퍼지는 듯하다. 일제 강점기인 소화 6년(1931년)에 세웠다 하여 한때 소화다리로 불리기도 한 부용교는 현대사의 비극을 거치면서 수많은 희생자를 낸 곳이다.

부용교를 지나 개천을 따라 올라가면 홍교가 나온다. 야산대장 염상진, 농민전사 하대치 등 빨치산들이 지주들의 집에서 쌀을 빼앗아 소작인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쌓아 놓았던 곳. 마침 인근 주민들이 홍교 옆으로 비닐을 길게 깔고 타작을 마친 알곡을 햇볕에 말리고 있어 흥미를 자아냈다. 홍교는 벌교의 상징이기도 하다. 벌교(筏橋)는 우리말로 뗏목을 엮어 만든 다리를 뜻하는데, 옛날엔 이곳에 실제로 뗏목으로 된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 다리는 비가 조금만 와도 끊어져 단교(斷橋)라고도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암사의 초안선사가 1723년(영조5년)에 돌다리인 홍교를 세웠다. 세 칸으로 이어진 무지개 모양의 홍교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아치형 석교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304호로 지정돼 있다.

초등학교 앞에 있는 남도여관도 소설처럼 생생하다. 소설 속에서 임만수와 빨치산 토벌대가 머무르던 남도여관은 비록 상가로 바뀌었지만 일본식 건축양식만은 50∼60년 전이나 다를 바 없다. 염상진의 동생 염상구가 돌아와 벌교 제일의 주먹이었던 땅벌과 희한한 결투를 벌이던 경전선 철다리 주위로는 갈대가 우거져 있다. 우익 청년단 행동대장이었던 동생이 위험을 무릅쓰고 벌교역에 나동그라진 빨치산 형의 시신을 수습하는 장면에서 인간이란 차이점(이념)보다 공통점(형제애)을 찾을 때 더 인간다울 수 있음을 깨닫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예술의 경지에 오른 욕설이 귀를 자극

'태백산맥'의 결을 따라 벌교를 둘러본 다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소설의 무대가 왜 벌교였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얼핏 보아서는 너무나 평범한 시골마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작가 조정래는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갈등, 빨치산의 이동 경로 등 소설의 기본구성을 고려할 때 이곳만큼 전형적인 곳이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작가의 변에 사족을 덧붙이자면 여기 전라도 방언이 유독 드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읍내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남도 특유의 걸쭉한 육담과 예술의 경지에 오른 욕설이 끊임없이 귀를 자극해왔다. 그만큼 삶의 활력이 넘치는 곳이라는 방증일까?

권경률 월간 여행에세이 편집장

사진 강성철

벌교하면 꼬막! 꼬막하면 벌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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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의 특산물은 역시 쫄깃한 꼬막이다. 벌교 꼬막은 육질이 탱탱하고 맛이 좋은 고단백 식품이다. 게다가 비타민과 칼슘, 철분 함유량이 많아 빈혈 예방과 어린이 발육에 좋다. 그래서 예로부터 벌교에선 꼬막을 최고 음식으로 친다. 제사상에도 다른 건 몰라도 꼬막만은 꼭 올라야 한다. 그러므로 벌교에 들렀다면 꼬막정식은 한번쯤 먹어볼 만하다. 꼬막정식에는 삶은 꼬막을 비롯해 꼬막전, 꼬막 초무침, 꼬막 비빔밥 등 꼬막으로 만든 모든 요리가 포함돼 나온다. 1인분에 1만5000원. 또 장암리 선창에 가면 꼬막을 직접 살수도 있다. 20㎏에 5만∼6만원 선으로 읍내에서 사는 것보다 비교적 저렴하다.

찾아가는 길

자가용:호남고속도로 승주IC에서 빠져 지방도 857번을 탄다. 3.2㎞ 가면 선암사 입구 작은 삼거리. 곧장 직진해 15.3㎞ 가면 낙안민속마을. 계속해서 857번을 타고 가면 벌교읍에 닿는다.

대중교통:철도를 이용할 경우 서울역에서 운행하는 광주 경유 순천행 열차를 타고 가다가 벌교역에서 내리면 된다. 광주역 또는 서광주역에서 순천행 경전선 열차로 갈아타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버스는 광주나 순천을 기점으로 벌교행 직행버스(10분 간격)가 다닌다.

문의:벌교읍사무소(061-857-6410)

http://www.boseong.jeonnam.kr/beolg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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