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은경이 만난 2005년을 달리는 사람] (17) 산문집·시집 함께 펴낸 시인 황청원

사진작가 박상훈의 새벽풍경 곁들인 산문집에 시 모음집 묶어 새로운 시도

집 ‘떠돌이 별로 떠서’ ‘바람 부는 날에는 너에게로 가고 싶다’ 등을 펴낸 30여 년 이력의 ‘성찰의 시인’ 황청원(50)씨가 5년 여의 침묵을 깨고 이야기를 건넸다. 주제는 어머니와 고향, 사랑, 인간관계, 그리고 시인의 사명. 새벽 풍경의 대표적 사진작가 박상훈씨의 향수를 자극하는 아련한 사진작품들에 이미지 글을 붙여 꾸민 산문집 ‘새벽여행’과 신작 시 10여 편을 더한 시집 ‘우리가 혼자였다면 얼마나 외로웠을까’(이마고)를 한 꾸러미로 묶어 펴낸 특이한 양식이다. 그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크고 작은 각기 다른 크기로 묶인 두 권의 책갈피 갈피마다 배어있는 비단실처럼, 씨줄과 날실처럼 교차하는 시인의 섬세한 감성. ‘천명을 알 나이’ 지명지년(知命之年)의 핵은 다시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걸까. 그 자신이 직접 바위에 쓴 ‘용설의 참기운 설동’이 마을 이정표로 서있는 경기도 안성 죽산 그의 집을 찾았다.

세월이 가도 익숙해질 수 없고

절대 ‘선수’가 될 수 없는 삶…

“기계 수련공은 세월이 갈수록 기술이 늘고 익숙해지지만, 하면 할수록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 바로 사는 일이에요. 나이가 들수록 사랑도 더 잘 할 것 같고, 인간관계도 더 잘 맺을 것 같은데…누구도 삶 앞에선 ‘선수’가 될 수 없다는 걸 새삼 깨닫곤 합니다. 이런 번뇌를 오랜만에 책 속에 쏟아 부었더니 책을 다 쓰고 난 후 마음이 훨씬 가벼워지고, 상처를 치유 받은 느낌이에요”

사실 황 시인은 일생 ‘어머니’를 찾아 구도의 삶을 살았고, 시의 영감을 얻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신 어머님은 그에겐 아픔이었지만, 결과적으론 하나의 문을 열어주었다. 늘 주변에 넉넉하게, 이타적 삶을 살았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고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한 채 불교에 입적해 승려의 길을 가게 했고, 이후 동국대 2학년 때인 77년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정식 등단하는 길로 이어지게 했다. 당시 종단의 한 노스님은 “이 세상에 부처님처럼 멋진 시인이 없을진대 무슨 흉내를 내려 하느냐”며 “무슨 번뇌와 상상이 그토록 많아 시를 쓰려 하느냐”고 힐난하곤 했다. 수행자와 시인의 역할을 병행하는 데는 많은 갈등이 따랐고, 그는 2년간 시골집에 은거해 ‘있는 듯 없는 듯’ 살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결과는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내 나름대로 수행하며 세상과 살아가자”는 환속. 그 후 시인의 삶은 어찌 보면 또 다른 형식으로 그의 어머니의 삶을 이어가는, 주위 사람들을 보듬는 형태로 펼쳐진다.

모성을 찾아 구도의 길, 시인의 길

이타적 사랑과 넉넉함에 늘 그리움

시인으로서의 삶 외에도 MBC ‘별이 빛나는 밤에’, KBS ‘문화살롱’, 불교방송 ‘행복 스튜디오’ 등 16년간을 숱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활약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주변 사람들을 만나고…이런 식으로 사람의 울타리를 주위에 만들어 놓았다. 고은, 김홍신 등 문학 친구부터 조폭 두목에 이르기까지. 때론 IMF 여파로 고사 위기에 놓인 프로그램을 살리기 위해 스폰서를 찾아다니며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이미 십여 년 전 죽산에 터를 닦은 그는 이후 연극연출가 김아라, 전위무용가 홍신자 등이 새 터를 닦을 때 적극적으로 정착을 도와주며 마을 사람들과의 벽을 허무는 데 한역할을 했다. “사랑해도 외로울 때 있나니 그때 꼭 말하세요 그래 우리가 혼자였다면 얼마나 외로웠을까”란 그의 시구를 늘 되새기는 듯하다.

그런데 사실 그가 정의하는 모성은 다소 구태의연하고 예측 가능하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자식으로부터 마음 거둔 적이 없습니다…자식이 슬프면 어머니 마음에는 핏물이 배고, 자식이 기쁘면 어머니 마음에는 꽃물이 번집니다…어머니의 마음은 바로 흙의 마음입니다. 언젠가 그 흙으로 돌아가 흙이 될 것을 알면서도 씨앗들 흙 속에 묻습니다. 그 씨앗들 또한 어머니의 자식입니다”라니.

“16년 라디오 프로 맡으며 쌓은

‘인간 울타리’덕에 외롭지 않아”

“지금의 1020세대가 부모가 된다면 달라질 거라고요? 세대 차이도 나고, 사는 환경도 변하고, 작은 변화들은 있을 테지만, 모성은 큰 틀에선 소프트웨어가 변할 순 있지만 하드웨어는 변하지 않는다고 봐요. 흔히들 그러잖아요? 우리 부모와는 다르게 살 것 같았는데, 어느새 닮더라고요. 모성의 뿌리인 헌신성은 절대 소멸되지 않고 반복될 거라 믿습니다”

7년 여 여성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직·간접으로 만난 많은 여성은 그에게 세상에 대해 많은 희망을 품게 해줬다고 한다.

“좋은 시인이 있어야 좋은 평론가가 나온다고 하잖아요? 가정이든, 사회든 여성의 반듯하고 단단한 생각이 곁의 사람들도 견고하게 만들어가죠. 훌륭한 여성 옆엔 훌륭한 남성이 생기게 마련이죠. 3040여성들이 중심이 돼 남성 중심사회에서 동등한 자격을 갖추고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죠”

격동의 80년대 광주항쟁을 목도하고 “저 피묻은 무등을 보면 나는 새빨간 뱀이 되고 싶다”고 열정적으로 절규했던 시인. 2년 전부터 떠돌이 고양이 한 마리와 진돗개 세 마리를 가족 삼아 전원에 칩거해온 현재의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어할까.

삶의 좌표 볼 수 있게 해주는 ‘비움’

스스로 부단히 노력해야 얻을 수 있어

“그동안 서울을 오가며 놓치고 살아온 것들을 여기서 비로소 느끼고 삽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조금씩 비워지는 느낌이죠. 이파리가 생기고, 그것이 무성해지고, 다시 빈 잎이 되어 다음 잎 날 것을 준비하고…이처럼 자연은 우리에게 ‘비울 것’을 강요합니다. 비우는 것은 행복의 기본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게 맘대로 안돼요. 노력해야죠. 그래야 부처님 말씀처럼 하루에 적어도 세 번쯤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고, 나란 여행자는 지금 어디쯤 서있나, 가늠할 수 있게 되죠”

“대나무 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속이 비어 있기 때문”이라는 그의 글귀를 떠올리며 “비울 것 비우고 행복하게 살다 갑시다. 함께”라는 그의 희망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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