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알-알위아 산부인과 병원

2003년 4월 9일 바그다드가 함락되던 날, 나는 국경을 넘어 바그다드로 향했다. 텅 빈 거리엔 시체들이 즐비했다. 사담 후세인 시절 그 앞에서 카메라를 들었다가 곤욕을 치른 적 있는 관공서 건물들이 불타고 있었다. 바그다드는 무법천지였다. 30년 사담 후세인 절대 권력의 상징이었던 대통령궁이, 중앙은행이, 국립박물관이 약탈되고 있었다. 병원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좀도둑들은 약품도, 수술도구도, 심지어 환자들이 누워있는 침대마저 훔쳐갔다. 그 혼란의 와중에 대부분의 병원이 문을 닫았다.

전기 없는 수술실서 아이 받아내고 응급수술…의료진은 새우잠에 귀가는 염두도 못 내

하지만 전쟁이 났다고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포성과 총격전에 놀란 임신부들이 조산을 하는 통에 환자는 더 많아졌다. 그런 응급환자들을 위해 알-알위아 산부인과 병원은 24시간 문을 열었다.
출산을 기다리는 임신부, 충격으로 아이를 사산한 산모, 암시장에서 구입한 정체 모를 약을 먹고 하혈을 하는 여성…병원 응급실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의사들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수술실에서 아이를 받아내고 응급수술을 했다. 밀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모두 병원에서 새우잠을 잤다. 집에 들어가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아이 아버지가 함께 있으니 아무 일 없겠죠…” 산부인과 전문의 사다는 가족에 대한 걱정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마취과 전문의 나디아는 누군가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모두 당신들, 전쟁을 일으킨 당신들 때문이야…”
20세의 마르와는 그 북새통에 첫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받아 안고 그녀는 펑펑 울었다. 미군이 이상한 폭탄을 떨어뜨렸다는 소문이 나돌던 지난 몇 주 동안 그녀는 기형아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막상 건강한 아이를 낳고 나니 또 다른 걱정이 그녀를 우울하게 했다. 아이가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딜 가야 약을 구할 수 있을까….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을 겁니다. 이런 고통을 어떻게 다시 겪겠습니까…” 아이를 품에 안고 젊은 엄마는 절규했다.

병원에서 한 가족 된 5살 마리암과 신생아 압바스…집은 폭격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내가 그 곳을 찾아 다녔던 2003년 4월과 5월, 알-알위아 병원에선 수많은 새 생명이 태어났고, 그 생명을 지키기 위해 많은 어머니가 죽어갔다. 그리고 인생의 축소판 같은 병원의 수술 대기실에서 두 아이가 살았다.
다섯 살 마리암과 생후 한 달이 채 안 된 압바스.
바그다드가 엄청난 폭격에 휩싸였던 4월 20일, 압바스의 어머니는 이 병원에서 압바스를 낳았다. 그러나 병원 주변에서는 잠시도 쉬지 않고 총격전이 벌어졌고 미군의 폭격도 밤낮이 없었다.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던 산모는 안정을 취하지 못 했다. 압바스의 아버지는 아내를 집으로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집은 바그다드 외곽에 있었고 병원처럼 혼란스럽진 않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먼저 데려다 놓고 압바스를 데리러 온다던 아버지는 그 후 소식이 끊겼다. 의사들은 부모의 생사를 수소문했지만 그들의 집이 폭격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만 들려 왔다. 이 난리 중에 아이를 입양할 사람도 없었고 결국 수술실의 수간호사인 사마라가 당분간 아이 엄마 노릇을 하기로 했다.
다섯 살 마리암은 수간호사 사마라의 딸이다. 아이는 압바스의 보호자 노릇을 했다. “압바시, 압바시, 예쁜 내 동생!” 우는 압바스를 달래고 우유를 먹이는 것도 마리암이었다. 이혼한 후 딸아이 하나만을 키우고 살던 사마라는 이 전쟁통에 마리암을 맡아줄 가족이 없었다.
아이를 혼자 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병원에 나오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고민 끝에 아이를 병원에 데려왔다. 그렇게 해서 마리암과 압바스, 두 아이는 알-알위아 병원의 가족이 됐다.

“어디든 전쟁이 없는 곳에서 몇 시간만이라도 살아 봤으면…” 긴 전쟁에 기진맥진

2004년 나는 바그다드 함락 1년을 맞은 이라크를 다시 찾았다.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나아진 것도 있었지만 전쟁 때보다 못한 것도 많았다. 특히 불안한 치안문제는 심각했다. 급증하는 폭탄테러와 인질사태로 민심도 흉흉해지고 있었다.
알-알위아 병원도 많이 변해 있었다. 1년 전 수술실에서 동고동락하던 의사들은 대부분 떠나고 아는 얼굴은 얼마 남지 않았다. 언제나 침착하게 수술실을 이끌었던 주임의사는 팔루자로 떠나고 없었다. 팔루자에서 주민과 미군의 충돌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뒤 그녀는 팔루자로 자원해 갔다.
수간호사 사마라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바그다드 중심가에 자살폭탄이 터졌을 때 근처에 있던 집이 파괴되었고 그 때 부상을 입은 다리가 아직도 성치 않았다.
여섯 살이 된 마리암은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힘없고 슬퍼 보였다. 며칠 전 마리암의 같은 반 친구가 유치원 근처에서 유괴됐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어린이 유괴사건이 급증해 엄마는 마리암을 집 밖으로 내보내기가 불안했다. 그렇다고 집에 아이를 혼자 둘 수도 없고…폭격 소리만 사라졌을 뿐 모녀의 처지는 전쟁 때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압바스는 어떻게 됐을까? “좋은 양부모에게 입양돼 잘 자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주 간단히 대답했다. 나는 많은 것이 궁금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이라크에서도 사람들은 입양사실을 숨기려 한다.
마취과 의사 나디아는 모든 것에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스카프를 쓰고 다니는 것도 불만이었다. “무슬림도 아닌 당신이 웬 스카프? 죽는 게 그렇게 무서운가?” 그녀는 독설을 늘어놓았다. “나는 죽는다 해도 스카프 같은 건 안 쓸거다. 감히 누가 내 자유를 구속하려고 하는 거야?” 그녀는 테러의 공포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못 쉬는 이라크의 현실에, 그 현실에 타협하는 사람들에게 분통 터져 했다. “어디든 전쟁이 없는 곳에서 몇 시간만이라도 살아 봤으면…” 나에게 작별 키스를 하며 나디아가 속삭였다. 언제나 강인해 보이기만 하는 나디아도 긴 전쟁에 지쳐가고 있었다.

팔루자 폭격으로 주임의사 생사 묘연…이라크 상황 아무 것도 나아진 것 없어 씁쓸

그들을 마지막으로 만난 지 어느덧 1년이다. 이라크 상황은 아무 것도 나아진 것이 없고 매일 들려오는 것은 폭탄과 죽음의 소식뿐이다.
알-알위아 병원의 친구들은 모두 잘 지내고 있을까?
지난번 팔루자 대공세 때 미군들은 테러리스트들의 은신처라 하여 팔루자에 하나밖에 없는 병원을 폭격했고 그 곳에 있던 환자와 의사들이 죽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팔루자 병원으로 자원해 간 알-알위아 병원의 주임의사는 어찌 됐을까? 살아남았을까?
이라크 입국비자를 봉쇄해버린 한국 정부를 원망하며 나는 알-알위아 병원에서 만났던 모든 사람들의 안부를 궁금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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